지난해 7월 증권감독원장 자리를 그만두고 현재는 한화그룹부회장겸
삼회투금 회장으로 있는 박종석씨는 흔히 관운이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남들이 한번 하기도 힘드는 은행장자리를 국민과 상업은행 두군데서 했고
은행감독원장에다 증권감독원장까지 지낸 다음 지금은 한화그룹의 금융담당
회장으로 있다.

이 박종석씨가 지난해 증권감독원장을 물러날 때 눈물을 흘렸다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물론 중도하차라는 점에서 본인의 좌절감은 컸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나는 기관장이 박원장 뿐만은 아니다.

증권가의 기관장중 만만한 자리로는 역시 투자신탁 사장들을 빼놓을 수
없다.

대한투자신탁 사장으로 있던 이진무씨는 지난해 사장자리를 물러난다
못한다로 한동안 말이 많았었다.

지자체 선거후 대구시 정무부시장으로 재기는 했지만 증권계의 마지막
TK가 어떻다는등 말이 많았었다.

이진무씨도 물러날 때 눈물을 흘렸었다.

정부가 임면권을 가진 자리인 만큼 언제든 물러나겠지만 임기만은 채우도록
해달라는 것이 본인의 하소연이었다.

그는 "잘못한게 뭐냐"는 듣는 사람도 없는 메아리만 남긴채 결국 사장자리
를 떠났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중도하차한 이사장 본인도 정작은 전임자의 임기를
중간에 잘라 먹으면서 사장이 되었다.

이사장이 물러났을 때 그 때문에 자리를 떠났던 그의 전임자는 아마도
"누구는 잘못이 있어 물러났나"라고 되뇌었을 게다.

세인의 주목과 여론의 동향엔 아랑곳없이 재경원의 말 한마디에 갈아치움을
당하고 또 재경원에 기대어 한자리를 차고 앉아야 하는 당사자들이 바로
증권가의 기관장들이다.

증권계의 기관장 자리는 공식적으로는 증권감독원 거래소 협회 증금 예탁원
전산등 6개에 불과하다.

여기에 8명의 투신사 사장 자리를 보탤 수 있다.

이 몇 안되는 자리를 두고 먹이사슬이 처절하다.

임기가 아직 남아있는 데 또 새사람을 밀어 넣어야 하는 임명기관(재경원)
의 속사정도 다급하기는 마찬가지다.

자리와 감투를 통해 봐줘야 할 사람이 많고 그래서 생태계의 밀도는
높아진다.

그때마다 재경원의 총무과장들은 속을 썩이고-.

물론 증권 관계기관장 대기자 명단의 1순위는 재경원을 퇴직하는 공무원들
이다.

이들은 억지로 내몰리는 입장이어서 자연스레 순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많이 내보내야 새사람을 승진시킬 수 있어 자리 잘만드는 장관이 대접
받는다는 사실도 긴 설명이 필요없다.

그래서 결사적이다.

이들이 훑어내고도 다행히 자리가 남게 되면 이제 국세청이나 한국은행
청와대 퇴직자들이 몰려든다.

물론 전리품을 노리는 정치권 인사들이 빠질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자리는 한정적인데 인사적체는 쌓여간다.

재경원은 먹이사슬의 생태계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안감힘을 쓴다.

물론 증권계의 모든 기관들에 재경원의 말발이 먹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증감원장은 대통령 임명직이다.

거래소 이사장은 재경원장관의 사후승인에 불과하며 협회는 말그대로
민간기구다.

재경원이 개입하고 간섭할 권한없음은 투자신탁도 마찬가지다.

투신은 주주총회에서 임원을 선임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재경원은 장자리는 물론이고 임원자리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지방투자신탁의 모사장이 겁없이(?) 임원 한사람 받아달라는 재경원의
청탁을 거절했다가 한동안 새 점포를 내지 못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재경원으로서야 본때를 보여놔야 새사람 내보낼 때 반대를 줄일 수 있다.

증권계의 기관장 자리는 이렇게 채워진다.

언제 후임자가 내려와 "미안합니다"하고 밀고들어올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기관장은 재경원에 잘보여야 하고 증시는 관치체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