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만, 'K팝 산업' 토대 닦은 문화대통령…'엔터제국' 꿈꿔
2011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SM타운 콘서트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 대중문화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아시아 ‘K팝’ 가수들이 사상 처음으로 유럽 문화의 한복판을 ‘침공’한 것이다. 유럽 소녀 팬들은 동방신기와 소녀시대의 공연을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프로듀서(사진)는 K팝이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상품이란 사실을 확인시켰다. ‘K팝 열풍의 선구자’, ‘엔터테인먼트 업계 표준을 선도하는 문화 대통령’이란 별칭이 늘 그를 따라다닌다. 걸어온 길이 K팝 산업의 역사가 됐다.

업계 첫 체계적 ‘스타 시스템’ 만들어

그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 최초로 ‘CT(Culture Technology·문화기술)’라고 불리는 체계적인 ‘스타 시스템’을 만들었다. CT는 △캐스팅 △트레이닝 △프로듀싱 △매니지먼트 등 네 가지 핵심 프로세스를 통해 화려한 군무와 신나는 음악을 들려주는 K팝 가수들을 육성했다. K팝 육성 시스템은 오늘날 글로벌 시장을 휩쓰는 K팝 경쟁력의 원천이다. 연습생을 선발하고, 오랫동안 트레이닝해 가수를 만드는 과정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불가능하다. 가수 스스로 크고, 성공한 뒤에야 에이전시에 일을 맡기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SM은 재능 발굴부터 트레이닝 및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는 세계적으로 유일한 회사”라고 보도했다.

방탄소년단을 길러낸 방시혁 빅히트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를 비롯해 박진영 JYP 프로듀서, 양현석 YG 프로듀서 등도 이 프로듀서가 만든 CT를 벤치마킹해 뛰어난 가수들을 배출했다.

이 프로듀서는 CT에 근거해 한류의 3단계 진화론도 제시했다. 1단계 한류가 문화상품을 수출하는 것이라면, 2단계 한류는 현지 회사 혹은 연예인과의 합작을 통해 시장을 확대하는 전략이다. 3단계 한류는 현지 기업에 SM의 CT를 전수하고 그에 따라 창출되는 부가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한류 스타의 ‘화수분’

이 프로듀서는 이 같은 철학과 비전을 실천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 2000년 중국 베이징 단독 콘서트의 대성공으로 신드롬을 일으키며 ‘한류’라는 말을 대중화한 H.O.T.를 시작으로, 한국 가수 최초로 일본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한 보아, 일본에서 오리콘 차트 앨범 및 싱글 부문 해외가수 역대 최다 1위 기록과 함께 단일 투어 최다 관객 기록 등을 세운 동방신기, 미국·남미·유럽 등에서 강력한 K팝 열풍을 선도해온 슈퍼주니어, 최고의 걸그룹으로 평가됐던 소녀시대 등 글로벌 K팝 스타를 지속적으로 키워냈다.

한국 가요계에서 12년 만에 밀리언셀러 음반을 낸 엑소, 개방성과 확장성을 앞세워 지역마다 멤버들을 바꾸는 새로운 형태의 K팝 그룹을 제시한 NCT, 아시아 가수 최초 데뷔 앨범으로 빌보드 메인 차트인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한 슈퍼M 등도 배출했다. 특히 ‘K팝 어벤져스’로 불리는 연합팀 슈퍼M의 성공은 ‘최고의 K팝 전략가’로서 위상을 입증했다.

이 프로듀서는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글로벌 공연 브랜드 ‘SMTOWN LIVE’도 성공시켜 프로듀싱 역량과 브랜드 파워를 다시 한번 확인케 했다. ‘SMTOWN LIVE’는 2008년 첫 투어를 시작한 이래 한국 단일 브랜드 공연 최초 프랑스 파리 입성, 아시아 가수 최초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 공연, 해외 가수 최초 중국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 공연 등 각종 기록을 세웠다.

2020년 그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침체된 세계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또 다른 희망의 빛을 쏘아 올렸다. 세계 최초 온라인 유료 콘서트 플랫폼 ‘Beyond LIVE’를 선보이며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다.

“버추얼네이션…미래엔 2개의 시민권”

그는 미래산업 진단과 기회포착에 능하다는 평을 자주 듣는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SNS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간파한 이도 그였다. 2012년 세계 최초로 가상국가 선포식을 연 게 대표적이다. 그는 한국 인구가 5000만 명이 아닌 수십억 명에 이르는 대국으로 커질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미래에는 누구나 두 개의 시민권을 갖고 태어난다”며 “하나는 아날로그적 출생국 시민권이며 다른 하나는 ‘버추얼네이션’ 시민권”이라고 했다.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통해 SM콘텐츠를 시청하는 세계 각지 팬들은 곧 SM타운, SM국가의 국민이라고 강조했다.

이 프로듀서는 ‘도전과 비전의 한류 리더’로도 불린다. 그가 프로듀싱한 아티스트, 음악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영향력을 한층 높였고, 이런 영향력이 한글, 한식 등 한국 고유의 문화가 세계 시장에 뿌리내리는 촉매가 됐다는 평가다.

2016년 한류로 세계 문화산업의 지형도를 바꾼 공로에 대해 미국 ‘아시아 소사이어티(Asia Society)’가 시상하는 ‘2016 아시아 게임 체인저 어워즈(2016 Asia Game Changer Awards)’에서 한국인 최초 수상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 이수만 총괄 PD는…
SM기획 창업해 신화·S.E.S 등 칼군무로 '보는 음악' 열풍 일으켜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프로듀서는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복고, 서울대 농공학과를 졸업했다. ‘학업’의 길로 갈 듯했던 그는 그러나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1971년 남성 듀엣 ‘사월과 오월’ 창단 멤버로 데뷔해 연예인의 길을 걸었다. 1975년 ‘모든 것 끝난 뒤’, 1976년 ‘한송이 꿈’ 등을 히트시키면서 MBC 10대 가수 남자신인상(1976), MBC 10대 가수상(1977)을 수상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1974년 라디오 DJ를 시작한 이후엔 ‘MBC 대학가요제’, ‘KBS 연예가중계’, ‘일요일 일요일밤에’ 등의 MC를 맡는 등 방송진행자로도 큰 활약을 했다. 사업가로 큰 전환점을 맞은 계기는 1981년 컴퓨터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떠난 미국 유학이다. 당시 미국 현지에서 MTV 개국을 보고 미래 음악시장이 ‘보는 음악’으로 바뀔 것으로 예감한 것이다. 귀국 후 그는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음악사업을 시작했다.

1989년 SM엔터테인먼트의 전신인 SM기획을 설립한 그는 1996년 아이돌 시초인 H.O.T.를 시작으로 S.E.S, 신화 등을 잇따라 히트시켰다. 세계적인 음악산업 경영자로 도약한 계기는 가수 보아였다. 1998년 초등학교 5학년이던 보아를 발탁해 일본시장을 겨냥한 여가수를 탄생시켰다. 그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시도된 적 없는 모험적인 방법들을 창안해 업계 표준으로 자리매김시켰다. 춤, 노래는 물론 외국어, 교양상식까지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일본인들은 데뷔 당시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보아를 자국인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보아의 춤과 노래 등 제작부문은 SM이 맡고, 유통과 마케팅은 일본의 에이벡스가 맡았다. 국내에서는 4단계 제작 및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확립했다. 이 프로듀서는 잘생긴 가수들의 화려한 군무를 앞세워 ‘보는 음악’의 절정을 제시했다. 이 같은 사업전략은 K팝 기업 대다수가 벤치마킹했고, K팝산업의 표준이 됐다. 그는 2010년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고 자신은 총괄프로듀서로서 세계화 전략에 매진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K팝산업의 개척자’로 인정받아 각종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미국 빌보드는 올해 글로벌 음악산업의 미래를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리더 22명을 선정한 ‘2020 빌보드 임팩트 리스트’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이 프로듀서를 선정했다.

■ 이수만 총괄 PD 약력

△1952년 서울 출생
△1971년 경복고 졸업
△1978년 서울대 농공학 학사
△1985년 캘리포니아주립 대학원 노스리지 컴퓨터공학 석사
△1989년 SM기획 설립 △1995년 SM엔터 설립
△2020년 미국 빌보드 ‘빌보드 임팩트 리스트’ 선정
△현 SM엔터 총괄프로듀서


유재혁 대중문화전문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