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이름보다 배역으로 더 빛나는 배우가 있다. 김혜옥씨(52)가 바로 그렇다.

드라마 '전원일기'의 깍쟁이 아줌마 '서울댁'부터 영화 '가족의 탄생'의 철부지 엄마,'미우나 고우나'의 표독스러운 시어머니 역할에 이르기까지.지난 30여 년간 김씨는 다양한 배역을 통해 자신의 이름보다 극중 인물을 더 알리며 작품을 빛냈다.

선배 연기자인 김수미 · 나문희씨와 함께 생애 첫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육혈포 강도단' 개봉으로 정신없이 바쁜 그를 서울 광화문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원래 배우가 되는 걸 꿈꾸셨나요.

"어렸을 땐 단 한번도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원래 성격이 내성적이거든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컷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다 어느 날 문득 대학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나를 좀 바꿔보고 싶었죠.원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홍익대 미대에 원서를 냈는데 떨어졌어요. 그런데 시험감독관으로 들어온 교수님이 그림에는 소질이 없어 보이지만 연기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하셨어요. 그래서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에 서울예대 연극과에 원서를 냈는데 덜컥 붙었습니다. 그게 시작이었죠."

▼연기가 적성에 맞던가요.

"처음에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잘 못했어요. 연극과에는 알아주는 재주꾼들이 많잖아요. 교수님들도 연기가 아니라 디자인이나 분장 쪽으로 바꿔보라고 충고하셨고요. 학교 극단에 들어갔는데 연습 첫날 대본을 같이 읽은 극단 동기들이 '쟤 때문에 못하겠다'며 그만 뒀어요. 정말 약오르고 속이 상했어요. 그게 도화선이었죠.제가 마음 먹으면 끝을 보는 성격이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죽기살기로 달려들었고,욕을 먹으면서도 무대에 계속 섰어요. 무대가 가장 좋은 연습장이었으니까요. "

▼첫 무대는 떨리셨겠습니다.

"무대에 서기 전까지는 정말 두려웠어요. 심장이 마치 천둥소리처럼 쿵쾅거렸죠.하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이 됐어요. 무대 위의 인물은 수줍어하고 내성적인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배짱이 생기더라고요. 정말 매력적이었죠.연기를 평생 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전혀 다른 나를 발견한 뒤로는 '이 일이다' 싶더라고요. 그리고 연기를 계속하다보니 내성적인 성격도 극복됐어요. 지금은 '수다왕'이 돼서 라디오 진행까지 하는 걸요. 사실 '내 성격은 못 고쳐'라는 말은 다 거짓이에요. 인생은 하얀 도화지라고 생각해요. 내가 선택하는 대로 가꿔나갈 수 있다는 거죠."

▼연극무대에서 10년을 보낸 후 TV드라마에도 출연하셨는데요.

"사실 연극을 하면서 생활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아요. 먹고 살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고,그래서 TV에 출연하기 시작했죠.연극 무대에서는 주인공이었지만 드라마에서는 '수사반장'의 범인 같은 조연밖에 할 수 없어요. MBC 드라마 '전원일기'에 '서울댁'으로 출연하면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느낌이 참 복잡했습니다. 나를 제대로 보여줄 수 없는 역할에 많이 속상했거든요. 하루 종일 빨래만 한 날도 있었으니 굴욕감도 컸지만 생계 때문에 안 할 수도 없었어요. 다른 드라마에 좋은 배역으로 출연한 적도 많았는데 다들 '서울댁'으로만 알더라고요. 연기자에게 이미지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

▼후회합니까.

"회의가 많이 들긴 했어요. 먹고 살자고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어 갈등도 많았죠.연기를 그만두고 양품점을 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결코 그 세월이 헛되지는 않았죠.제 연기의 자양분이 됐거든요. 김혜자 · 김수미 선배님처럼 훌륭한 배우의 연기를 바로 옆에서 보고 배울 수 있었잖아요. "

▼배우를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연기를 하고 나면 저만 알 수 있는 느낌이 있어요. '이 역할은 내가 정말 잘 소화해냈구나''이 역할은 내가 잘 몰입하지 못했구나'하는 그런 느낌이요. '이걸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했는데 잘 해냈을 땐 쾌감이 크죠."

▼연기력을 키우는 비결이 있습니까.

"연기라는 게 전혀 생뚱맞은 역을 하는 게 아니에요. 연기는 경험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자기가 경험했던 일 중 비슷한 부분을 극대화해서 표현하는 거죠.완전히 똑같은 상황은 아니겠지만 과거의 기억 속에는 비슷한 장면들이 다 축적돼 있잖아요. 그런 걸 잘 끄집어 내서 활용하는 거죠.연기할 때 일부러 어떻게 해야지 하는 적은 별로 없어요. 50년을 살아왔잖아요. 이제는 어떤 느낌이든 거의 다 경험해 봤다고 할 수 있죠."

▼어리거나 경험이 적으면 연기를 잘 못하나요.

"꼭 그런 건 아니죠.연기는 기본적으로 남을 흉내내는 것에서 시작하잖아요. 좋은 드라마를 보고 책도 많이 읽으면 충분히 도움이 되죠.저는 감정을 잘 비워요. 한번 지나간 드라마는 기가 막히게 잘 잊어버리죠.연기자가 연기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다 담아두면 못 살아요. 그래서 배우는 비우는 직업이에요. 지금 내 앞에 닥친 연기를 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

▼예쁜 여주인공에서 아줌마 배역으로 바뀔 때 거부감이 들진 않습니까.

"저는 '전원일기'에서 '서울댁'만 20년 가까이 한 사람입니다. 배우에게 나이란 큰 의미가 없어요.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고 좋지요. 경험이 축적된 만큼 연기의 폭이 얼마나 넓어지는데요. 같은 아줌마라도 다양한 캐릭터가 있는 만큼 재미있어요. "

▼연기 경력만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섭섭하지 않나요.

"화려한 경력을 쌓아가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복이 있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지금의 제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드라마에,영화에,라디오 진행에 정신 없어요. 고생하는 후배들에게도 항상 지금의 어려움이 나중에 다 밑거름이 될 거라고 얘기해줍니다. "

▼나이가 들어도 아름다운 비결은요.

"별다른 비결은 없고,저는 걷는 것을 좋아해요. 차에 항상 운동화를 싣고 다니죠.언제 어디서나 틈만 나면 걸어요. 그리고 제가 불교신자라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108배를 하면서 마음을 다스려요. 그러면 스트레스를 덜 받게 돼요. "

▼매니저가 없다면서요.

"누가 옆에 있는 게 부담스러워요. 옆에 누가 있으면 그 분한테 잘 해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연기에 집중하기도 힘들어요. 방송에 출연할 때에도 코디 아가씨는 따로 오라고 해요. 저만의 세계에 있고 싶으니까요. "

▼언제까지 배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할 때까지는 하고 싶어요. 할머니가 돼도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나이의 배우만 할 수 있는 게 있으니까요. 배우의 가장 큰 보람은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는 거예요. 저도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힘들었을 때 다른 분들의 위로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어요. 연기는 제게 주어진 유일한 재능입니다. 가능하다면 제가 가진 이 재주로 평생 여러 사람들을 위로하며 기쁨을 주고 싶어요. "

글=박민제/사진=신경훈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