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법(無法)이 곧 법(法)이다." 중국 청대(淸代)의 서화가 석도(石濤)는 말했다. 옛 법도를 체득하되 전통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창작하라는 뜻이다. 서예가 황석봉(54)씨가 파격의 전시회를 연다. 12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소격동학고재에서 열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전. 전시제목은 문자를 쓰지 않고도 문자가지니는 의미를 전달한다는 뜻이다. 전통서예는 문자를 그 요체로 했다. 황씨는 1990년대 들어 이에 반기를 들었다.서예의 정신과 회화의 양식을 접목코자 한 것이다. 그는 이를 현대적 조형서예라고정리했다. 3천년 동안 이어져온 서예 관행에서 탈피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림일까, 글씨일까. 출품작을 보면서 갖는 의문이자 혼돈이다. 보통의 서예전을 생각하고 왔다가는 당황하기 쉽다. 누가 봐도 회화전같기 때문이다. 혹시 길을잘못 든 것은 아닐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릴지도 모른다. 황씨는 서예의 기본인 지필묵(紙筆墨)을 사용하지 않는다. 종이 대신 캔버스나오동나무 상자를 쓰고, 붓 대신 나이프를 이용한다. 의미가 전달되는 문자는 찾아볼수 없다. 불립문자라는 제목이 실감된다고 할까. 얼른 보면 영락없이 추상회화이다. 그럼에도 황씨는 서예라고 주장한다. 형식의 변용은 있을지라도 정신과 행위는서예라는 얘기다. 그의 작품은 점, 선, 획을 한자의 상형에서 빌려왔다. 조형성과행위성은 틀림없이 서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의 말처럼 황씨의 서예는 붓끝에 시원을 둔다. 그는 수십년 동안 전통서예를해오면서 한계에 부딪히곤 했다. 획일적 모방은 창작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은채 틀에 박힌 반복만을 요구했다. 이런 흐름을 극복하지 않고는 진정한 서예인으로서 내면의 세계와 만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황씨는 1991년에 창립한 한국현대서예협회의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이 협회는서예의 예술화, 세계화, 대중화를 기치로 내걸고 출발했다. 서예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예가 일반에서 멀어진 데는 사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려운 한문 중심인데다 문장은 하염없이 길기 일쑤였다. 흑백만의 단순함도 시대흐름을 따라잡기에는벅찼다. 그는 글자를 점과 획으로 응축시켰고, 회화적 색채도 도입했다. 그리고 마음에 요동치는 파장을 있는 그대로 풀어냈다. 개인전은 이번이 10번째. 지금과 같은 서예작업은 1998년 7회 전시 때부터 선보였다. 이후 변화를 거듭하며 종이와 붓마저 뛰어넘었다. 그는 자신의 서예행위가 기운을 발산하는 방법이라며 예술적 지향을 `기(氣)아트'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서예의 새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는지, 아니면 서예의 본령을 훼손하고 있는지, 그에대한 평가가 궁금하다. ☎720-1524-6.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