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시드투자(초기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167곳의 평균 투자 유치액은 4억7000만원. 이 중 이례적으로 100억원대 대형 투자를 이끌어낸 곳들이 있다. 콘텐츠 지식재산권(IP) 스타트업인 디오리진, 모바일 게임 스타트업 리치에일리언이 대표적이다.

보통 시드투자는 스타트업의 대표 제품 또는 서비스가 공식적으로 나오지 않았거나, 아직 시장에서 검증받지 못한 단계에서 이뤄진다. 그럼에도 주요 벤처캐피털(VC)과 대기업들이 큰돈을 베팅했다면 사업모델이 탄탄하거나 창업 멤버들의 전문성이 높은 경우다. 공식 서비스 출범 전 이뤄진 테스트에서 시장성을 인정받아 수십억원을 유치한 업체들도 주목받았다.

○133억원 유치한 ‘세계관 강자’

 그래픽=전희성 기자
그래픽=전희성 기자
12일 벤처투자업계에 따르면 올 상반기 최대 규모의 시드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은 지난달 133억원의 종잣돈을 확보한 디오리진이다. ‘세계관 강자’로 불리는 이 회사는 게임, 영화, 드라마, 웹툰 등 여러 형태로 확장할 수 있는 IP를 개발한다. 투자를 주도한 이지수 한국투자파트너스 수석팀장은 “하나의 IP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다양한 매체로 확장해 나가는 데 강점이 있는 팀”이라고 평가했다. 모바일 게임 ‘서머너즈워’ 세계관 개발, 도넛 브랜드 노티드로 유명한 GFFG의 브랜드 IP사업 등을 진행했다.

디오리진은 콘텐츠 전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는 세계관을 구축해 IP를 기획하는 게 특징이다. 콘텐츠회사들과 협업해 IP를 개발하고 발생하는 매출의 일정 비율을 가져간다. IP가 성장할수록 디오리진이 가져가는 돈도 불어나는 셈이다. 마블 유니버스와 해리포터, 포켓몬스터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팬덤을 형성할 수만 있다면 추가 비용 투입 없이도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넷마블 IP사업팀장 출신이자 세계관 작가인 정재식 대표가 디오리진을 창업했다. 현대자동차 오픈이노베이션 플랫폼을 운영했던 성대경 최고전략책임자(CSO), 봉준호 감독과 ‘설국열차’에서 합을 맞췄던 조민수 크리에이티브디렉터, 웹툰 ‘싸우자 귀신아’로 유명한 임인스 작가도 합류해 화려한 팀 라인업을 갖췄다.

○유명 IP 기반 게임사에도 돈 몰려

캐주얼 게임 스타트업인 리치에일리언도 115억원의 시드투자를 받았다. ‘랜덤다이스’로 성공을 거둔 모바일 게임 회사 111퍼센트의 자회사다. 이 회사에 투자한 스톤브릿지벤처스의 송영돈 이사는 “검증된 IP와 게임 요소, 비용 절감이 가능한 인공지능(AI) 기술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카카오와 라인게임즈 등을 거친 최성욱 대표가 회사를 이끈다.

가장 기대를 받는 리치에일리언의 게임은 일본 유명 만화인 ‘도박 묵시록 카이지’를 기반으로 한 도시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 만화의 세계 독자는 3000만 명으로 영화로 제작된 적이 있지만 본격적인 게임 제작은 리치에일리언이 처음이다. 하반기 출시될 이 게임이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하면 리치에일리언의 기업가치는 훌쩍 뛸 가능성이 높다.

○베타 테스트로 시장성 검증

중고 패션 쇼핑 플랫폼인 차란을 운영하는 마인이스는 서비스 공식 출시도 전에 41억5000만원의 투자를 받아 업계의 이목을 끌었다. 지난해 알파·베타 서비스 테스트로 시장성을 빠르게 검증하고 자체 오퍼레이팅 시스템을 구축한 성과를 인정받았다. 베타 서비스를 운영해본 결과 전체 구매 고객 중 58%가 재방문 고객이었다. 한 VC 관계자는 “짧은 시간에 철저한 시장 검증 계획을 갖고 성공적으로 테스트를 수행한 실행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중고 패션 시장의 빠른 성장세도 투자사들이 마인이스에 관심을 보인 배경으로 꼽힌다. 국내 중고 거래 시장 규모는 25조원, 이 중 의류 중고 거래는 5조원 정도다. 마인이스가 이 가운데 5%의 점유율만 확보한다고 가정해도 2500억원 시장이다. 마인이스를 설립한 김혜성 대표는 명품시장 규모에 육박하는 중저가 의류 시장을 주목했다. 명품 브랜드를 주로 취급하는 다른 리셀 플랫폼과 달리 제조·직매형 의류(SPA) 브랜드 등 폭넓은 상품군을 다루는 게 특징이다.

○팹리스 스타트업에도 러브콜

반도체 설계(팹리스) 스타트업 메티스엑스는 85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지난해 설립된 이 회사는 차세대 메모리 인터페이스인 ‘컴퓨트 익스프레스 링크(CXL)’ 기반 메모리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다. 중앙처리장치(CPU) 중심 기존 컴퓨터 구조보다 빠르고 비용 효율성이 높다. 방대한 데이터를 다루는 AI, 유전자 분석 같은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투자사들은 메티스엑스의 구성원에 집중했다. 메티스엑스를 이끄는 김진영 대표는 엔지니어 출신 SK하이닉스 최연소 임원이다. 41세에 SK하이닉스 부사장이 돼 미래 아키텍처 개발을 진두지휘하는 등 15년 이상 메모리 기반 솔루션을 연구한 전문가로 꼽힌다.

메타버스 플랫폼 재미버스 개발사인 넥스터도 41억5000만원의 시드투자를 받았다. 창업자인 전주천 대표는 초상권 개념이 희박하던 2002년 당시 월드컵에 출전한 축구 선수들과 초상권 계약을 해 아바타 아이템을 팔아 성공한 인물이다.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알려지지도 않았던 21년 전에 아바타 커뮤니케이션 기능에 게임 요소를 접목해 사이버 공간을 열고 각 사용자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던 경험이 있다. 재미버스 역시 사용자가 창작하거나 구매한 콘텐츠에 대해 사용자가 소유권을 가지고 거래하는 플랫폼이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