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근 대표, 투자 못받아 일본行…3兆 가치로 상장 추진
“대출이 불가합니다. 이른 시일 내 2700억원을 상환하십시오.”

2차전지 분리막 제조업체 더블유씨피(WCP)의 최원근 대표(사진)는 2019년 일본 은행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한국 대법원의 미쓰비시 강제노역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한 때였다. 불똥은 일본 내 한국 기업으로 튀었다. 제로금리였던 일본에서 투자금을 조달했던 그는 눈앞이 깜깜했다. 이자 납기일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는데, 일본 은행은 회사가 3년 연속 적자여서 원금 상환 능력이 없다고 몰아세웠다. 대출 만기는 5년이나 남아 있었다.

최 대표는 “삼성SDI로부터 승인받고 공급을 시작했는데 빚 갚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했다”며 “어렵게 투자를 받았는데, 시장에서 제대로 기업가치를 인정받아야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WCP가 코스닥시장 상장을 추진하는 이유다.

○국내 투자 못 받아 일본行

WCP는 2차전지의 4대 소재 중 하나인 분리막을 제조하는 회사다. 모회사는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더블유스코프코퍼레이션(W스코프)으로 46.02%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 회사는 한때 시가총액이 1조원에 달했지만, 한·일 관계가 악화하면서 주가가 반토막이 났다. 최근 자회사 WCP가 코스닥 상장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시가총액 946억엔(약 9000억원)대를 회복했다.

한국인인 최 대표가 일본에 회사를 세운 이유는 국내에서 투자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첫 직장인 삼성전자에서 LCD용 편광필름 국산화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멤브레인’(막) 필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국내 기업들은 포장재, 테이프 등에 쓰이는 PET 필름을 주로 생산했고 LCD용 필름은 전량 해외에 의존했다. 전 세계 시장을 2~3곳이 독점하다 보니 가격도 비쌌다. 힘들게 LCD를 개발해 필름 회사에 돈을 퍼주는 꼴이었다.

소재산업을 눈여겨봤던 그는 2차전지 분리막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전기차 시장이 커지면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국내 투자자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번번이 투자 유치에 실패하며 실의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은 노무라증권 출신인 일본인 벤처캐피털리스트였다. 1000만달러를 선뜻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본사를 일본에 두고 일본 증시에 상장하는 조건이었다.

최 대표는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공장은 한국에 세우겠다고 했다. 2005년 W스코프를 설립하고 충북 청주시 오창읍 외국인 투자단지에 8만㎡의 부지를 임차했다. 임직원은 36명. 중고 필름 제조 설비를 들여오고 일본인 기술자 세 명을 고용해 밤낮으로 연구에 매진했다. 2006년 여름 첫 샘플이 나오기까지 1년이 걸렸다.

이듬해 첫 매출 1억원을 내긴 했지만, 배터리 제조사들은 이름 없는 중소기업 제품을 신뢰하지 않았다. 기회는 중국 업체를 대상으로 근근이 영업하던 중 찾아왔다. 미국 배터리업체 A123시스템이 제품 개발을 의뢰한 것이다. 미국 셀가드의 건식 분리막을 안정성 개선을 위해 습식으로 바꾸고 싶은데, 일본 아사히카세이와 같은 대기업은 맞춤형 제품을 개발하지 않는다고 했다.

최 대표는 승부수를 던졌다. 습식 분리막 샘플을 만들어 미국으로 날아갔다. 그는 셀가드가 A123시스템에 공급했던 분리막을 W스코프의 제품으로 전량 교체하는 계약을 따냈다. 3년간 3000만달러 규모였다.

○첫째도 생산성, 둘째도 생산성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 같았지만 전기차 시대는 생각보다 빨리 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고객사 A123시스템이 파산해 중국 완샹그룹으로 넘어갔다.

회사는 빚더미에 앉았다.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전기차 수요가 급증하던 2019년 삼성SDI와 계약에 성공하면서다. WCP는 그해 348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2020년 1119억원, 지난해에는 1855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선제적으로 2세대 코팅 습식 분리막을 개발한 효과를 톡톡히 봤다.

WCP는 소형, 중대형, 일반형, 코팅형 등 다양한 사이즈와 형태의 제품을 맞춤 제작할 수 있는 설비를 갖췄다. 자체 기술력으로 세계 최대인 5.5m 광폭 생산 설비도 제작했다. 국내 시장 점유율 1위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의 설비보다 생산 효율이 높다는 게 최 대표의 설명이다.

“WCP는 자금력이 풍부하지도 않고 인지도도 낮지만, 맨땅에서 한국인의 기술력으로 해냈다는 자부심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는 최 대표는 상장 후 코스닥시장 대장주로 자리잡는 게 목표라고 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