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서울대 출신 증권맨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노경목의 미래노트]
"한국의 현실과 닮았다." "나도 결국 오징어게임 속 말일 뿐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대선 주자부터 유력 정치인의 아들까지 드라마 속 설정에 비춰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자신을 등장인물에 투영한다.

그렇다면 오징어게임은 구체적으로 한국사회 혹은 현대사회의 어떤 면과 비슷할까. 2015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의 최근 저작인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힌트를 얻을 있다. 뛰어난 미시경제 이론가이면서 빈곤과 불평등, 사회발전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저자는 세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절망사'라는 개념을 구성한다.

물론 디턴이 책에서 관찰한 것은 미국 사회다. 하지만 절망사에 이르는 미국인들과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이 비슷하듯, 책 속의 미국 사회와 한국 사회도 닮았다.

스스로 절망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참가자들

○오징어 게임에선=첫번째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참가한 456명 중 255명이 희생된다. 참가자의 44.1%만 살아남은 것이다. 남은 게임은 다섯개. 이후에도 56%씩 참가자들이 탈락한다면 살아남는 인원은 3명이다.

아무리 육체적·정신적 능력이 탁월하더라도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수치다. 하지만 투표를 통해 게임을 중단하고 빠져나갔던 이들 중 187명이 게임에 복귀한다.

복귀한 이들은 하나같이 "현실이 게임 속보다 더 지옥 같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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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턴은=2000년대 이후 미국의 자살 및 총사망률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선진국에서는 생활수준 및 의료기술의 향상에 따라 총사망률이 낮아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사망의 원인을 분석한 디턴은 이같은 현상의 원인을 알게 됐다. 술과 약물 등의 중독에 사망이 늘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가 처방한 진통제인 오피오이드에 의한 사망자만 2017년 7만237명으로 총기나 자동차 사고 사망자보다 많았다.

알코올성 간질환으로 인한 사망자도 크게 늘었다. 자살과 약물남용까지 합치면 2017년 사망자는 15만8000명이었다. 같은 해 교통사고 사망자는 4만100명, 살인사건 1만9510건 대비 압도적으로 많다.

디턴은 이같은 중독과 자살의 이면에 절망이 있다고 봤다. 현실의 신체적·육체적 고통이 너무 심해 극단적인 상황에 몰릴 것을 알면서도 약물과 술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종류의 죽음에 '절망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1970년 이후 생활수준의 향상 등으로 대표적인 사망원인인 심장병과 암으로 인한 사망자가 급격히 줄었지만 절망사는 빠르게 늘었다. 45~54세 사이 백인의 절망사는 1990년 10만명당 30명에서 2017년 10만명당 92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이런 종류의 죽음은 모두 자해에 의한 것이다. 총을 쏘면 순식간에, 약물에 중독되면 총보다 느리고 덜 확실하게, 그리고 술을 마시면 그보다도 더 느리게 숨을 거두게 된다. 이 세가지 원인에 의한 죽음을 절망사로 부를 수 있다."

○지금 한국에선=한국의 자살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가장 높다. 지난 7월 OECD가 발간한 '보건통계 2021'에 따르면 2018년 한국의 자살 사망률은 인구 10만명당 24.7명으로 OECD 국가 평균(11.0명)의 두배였다.

통계청의 최근 발표에서도 지난해 자살 사망률은 10만명당 25.7명이었다. 2019년보다는 소폭 낮아졌지만 2018년 대비 늘어난만큼 여전히 OECD 최고 수준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음주 등 알코올 관련 사망자도 늘고 있다. 지난해 알코올 관련 사망자는 10만명당 10.0명으로 전년 대비 9.8% 증가했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절망사할 가능성 높아

○오징어 게임에선=빚에 내몰린 사람들인만큼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경제적·사회적 지위가 낮다.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는 생활고를 타개할 방법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장기 실직 노동자인 주인공을 비롯해 탈북자, 이주노동자, 강간 피해 여성 등이 게임의 참가자들이다. 서울대를 졸업한 금융인 출신은 오징어 게임 내에서도 상당히 예외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대부분이 중장년 이하의 나이로 극중에서 노인은 1번 참가자 이외에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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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턴은=절망사의 원인을 찾다가 학력에 주목했다. 대학 졸업자와 그 이하 학력을 비교하면 학사 학위가 없는 이들을 중심으로 뚜렷하게 절망사가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1935~1945년생들만 하더라도 학력에 따른 자살률에 차이가 없었지만, 이후 고졸 이하 백인들의 자살률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해 1980년대 이후 출생자에 이르러서는 고졸 이하 백인이 자살할 확률은 대졸자 대비 4배 이상 높아지게 됐다. 2017년만 기준으로 놓고 보면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절망사에 처할 확률은 세 배 더 높았다.

1990년대초 이후 45~54세 백인의 전체 사망률은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학력별로 뜯어보면 대졸 이상 학력의 사망률이 40% 떨어지는 사이 고졸 이하 사망률은 25% 높아졌다.

저학력은 저소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2017년 기준 미국에서 대졸 이상 학력자의 소득은 고졸 이하 대비 두 배 이상 높았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종식된 2010년 이후 2019년까지 미국에서는 160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지만 고등학교 학위만 가진 사람들의 자리는 5만5000개에 불과했다.

1979년부터 2017년까지 40년 가까운 기간을 분석해도 대학을 나오지 못한 백인 남성의 중위임금은 연평균 0.2%씩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정 나이를 지나면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되는 학력에 갖쳐 경제적 여건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선=2019년 보건복지부가 서울대 의과대학에 의뢰해 작성한 '2018년 자살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종학력이 높을수록 스스로의 건강상태가 좋다고 응답한 비율이 높았다. 대졸 이상이 83.4%, 고졸은 77.6%, 중졸 이하는 68.9%로 학력에 따른 차이가 컸다.

알코올 중독과 학력의 상관관계와 관련한 조사에서는 결과가 엇갈렸다. 학력이 낮을수록 알코올 중독에 빠질 위험이 높다는 연구도 있었지만 반대 결과도 있었다.

다만 43.4%로 OECD 평균 대비 3배에 이르는 노인 빈곤율을 감안할 때 경제적 여건만 놓고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를 뽑았다면 노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에서 게임의 설계자인 노인의 참가는 이례적인 것이지만 실제로는 반대라는 것이다. 다만 이는 게임의 재미를 위한 주최측의 설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근본 문제는 물질의 빈곤 아닌 관계의 빈곤

○오징어 게임에선=참가자들은 대부분 가족과의 관계도 끊어져 있다. 주인공은 이혼해 친딸의 얼굴도 잘 보기 힘들고, 탈북자는 경제적 사정으로 동생을 보육원에 맡긴다. 주인공의 후배도 경제적 문제에 쫓겨 수년째 가족을 만나지 못한다. 다른 참가자들의 가족관계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주인공이 막대한 부를 거머쥔 이후 결말 부분에서 가족 관계가 회복된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탈북자의 동생과 후배의 어머니가 만나 유사 가족 관계를 맺게 된다. 주인공도 미국에 있는 딸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발걸음을 돌린다.

○디턴은=단순히 빈곤만으로는 절망사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경제적 뒤처짐은 시작에 불과할 뿐 더 광범위하고 큰 해악을 끼치는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심한 주는 뉴욕과 캘리포니아지만 사망률은 가장 낮다.

디턴은 절망사를 부르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으로 고립감을 든다. 가정과 직장, 지역사회 등에 소속되지 않고 고립된 약자들이 쉽게 중독에 빠지고 절망사에 처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서 저소득·저학력층을 중심으로 미혼모가 빠르게 늘면서 전통적인 가족을 유지하는 이들은 줄고 있다. 여성은 아버지가 다른 여러 아이를 키우느라 빈곤을 탈출하지 못하고, 남성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거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다. 이는 깊은 고립감을 불러일으켜 중독과 절망사에 이르게 한다.

서비스업 중심으로 산업이 재편되면서 직장에서 과거와 같은 소속감을 가지지 못하게 된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똑같은 급여를 받더라도 정규직으로 고용돼 제조라인에 배치돼 있는 것과 하청업체에 속해 물품 계산 업무를 하는 것은 소속감이 다르다.

"저임금 일자리의 상당수는 말단이라도 성공한 기업의 일원이 됨으로써 느낄 수 있었던 자부심을 주지 못한다. 청소부, 관리인, 운전기사, 고객 서비스 대표 등은 대기업이 직접 고용했을 때는 소속감을 느끼지만, 그들이 임금은 낮고 승진 가능성이 적은 하청 서비스업체 소속일 때는 그같은 감정을 갖지 못한다."

아울러 한때 미국 지역사회의 중심이었던 교회 출석률이 백인 저학력층을 중심으로 현저히 감소하면서 지역 사회와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민권운동의 성공으로 능력 있는 흑인들이 슬럼가를 탈출할 수 있게 됐던 1960년대 흑인 사회를 연구한 마이클 영은 이같은 일부 흑인들의 성공이 남은 흑인들에게 절망에 빠뜨렸다고 지적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있던 커뮤니티가 소위 '패배자'들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흑인 커뮤니티는 나이에 상관 없이 무력감에 빠지게 됐다는 것이다.

디턴은 비슷한 현상이 저학력 백인사회에서도 나타나게 됐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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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에선=지난달 29일 통계청이 만 60세 이상 고령자를 대상으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독신 고령자들은 아침 식사와 수면시간, 운동 등에서 기혼자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후준비가 됐다고 응답한 것도 전체 고령자 평균이 48.6%인 반면 혼자사는 고령자는 33.0%에 그쳤다.

고립감은 실제로 자살과도 강력한 상관 관계를 가진다. 201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배우자가 있는 사망자 중 자살자는 6.0%에 그쳤지만 미혼 사망자는 22.8%, 이혼한 경우는 12.1%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집계됐다.

미래를 걱정하는 노학자의 혜안

'오징어 게임' 서울대 출신 증권맨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노경목의 미래노트]
디턴은 1945년생으로 올해 만 76세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서 볼 수 있듯 이미 학술적인 성취를 충분히 일구고도 당대의 문제를 직시하고 원인을 파고 들어가는 지적 활력은 인상 깊다.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 절망에 내몰린 이들의 극단적인 선택은 한국이나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해결책이 '좋았던 옛날'의 복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쉽다.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정상 가족과 지역 커뮤니티, 정규직 노조에 온전히 소속될 수 있는 일터 등이다. 사회 및 산업구조의 변화 속에 과거로 사라진 유산을 다시 불러낼 수 있을까.

사실 한국 사회의 빈곤에 대한 지원 폭은 크게 확대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생계수급자 선정 기준을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바꿨고, 문재인 정부에서는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했다. 두 조치의 효과를 합하면 국가의 도움으로 생계를 부지할 수 있는 사람은 100만명 이상 늘어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삶이 그렇게 나아졌다고 느끼지 않는다. 늘어나는 자살률과 알코올 중독을 보면 이를 단순히 엄살로 치부할 수는 없다.

디턴이 이야기한 절망사의 근본 원인을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