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자동차·반도체·바이오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전환의 시기에 틈새를 파고든 추격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기술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기에 기회를 포착했고, 정부는 산업육성 정책으로 측면 지원했다. 기술이 산업 판도를 뒤흔드는 4차 산업혁명 시기에는 승자의 함정에서 벗어나 발빠른 사업재편에 나서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은 산업화 기간 조선, 철강, 반도체, 자동차 등 주요 분야에서 선진국을 추격·추월해왔다. 스마트폰의 부상과 더불어 애플과 삼성전자가 양강 체제를 구축한 휴대폰산업은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분야다. 후발주자였던 한국은 퀄컴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시장에 진입했고, 스마트폰 시대가 열렸을 때 삼성전자는 개방성 높은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선택하는 승부수로 시장의 선택을 받았다. 반도체 분야의 성취는 ‘기적’으로 평가된다. 삼성전자는 경쟁이 치열한 최신 D램이 아니라 한 세대 전 제품을 양산하는 방식으로 위험을 줄이는 전략을 폈다. 이후 기술격차를 차츰 줄여 1992년 64Mb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주도권을 장악했다.

자동차산업 역시 한국이 일본 등 선진국을 추격한 대표적 사례다. 현대차·기아는 1960년대 자동차 생산 기술력이 전무했지만 세계 5위권 자동차 판매회사로 성장했다. 국내 자동차 회사들은 가솔린 엔진에서 전자제어식 엔진으로의 기술 패러다임이 바뀌는 틈새를 잘 파고들었다. 정부는 물품세 50%, 자동차세 66%를 감면하고, 대규모 금융지원을 제공해 내수 활성화를 유도했다. 이는 국내 자동차 업체들이 대규모 투자를 통해 자동차 제조 기술을 내부화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동안 한국이 기술을 주도해왔거나 추격에 성공한 산업들도 4차 산업혁명 시기를 맞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자동차는 자율주행 분야 등에서 기술우위를 확보한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에 기술 종속이 우려된다. 반도체 기술 패권을 둘러싼 주요국의 다툼도 치열해지는 양상이다. 이에 글로벌 공급망을 주도할 수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기술협력 생태계 구축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배적 위치에 도취한 기업은 전환의 시기에 도태될 수밖에 없다”며 “항상 새로운 시장과 제품을 찾아 움직이고 새 패러다임에 올라타야 한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를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동안 한국 패스트 팔로어 전략으로 세계 무대에 대응했다면, 이제 기술 혁신을 선도하는 퍼스트 무버로 나서야 한다는 의미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는 “전환의 시기는 위기이자 기회”라며 “국내 기업들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열어가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