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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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한국 경제의 공적이자 최대 악마는 대기업이다. 저성장은 낙수효과 없이 이익을 독식하는 재벌때문이고,실업도 취업에 무심한 대기업 탓이고,투자가 안되는 것도 큰 기업들이 금고에 돈을 쌓아놓고 안풀기 때문이라고 공격한다. '삼성이 망해야 한국 경제가 산다'는 식의 공격도 끊임없다.

여의도 국회에서는 대기업 즉 재벌체제는 한국 만의 잘못된 구조라며 적극적인 규제로 '대기업 천국'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논의가 넘친다. 다른 선진국들처럼 대기업 비중을 낮추고 공생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 경제의 미래가 없다는 주장이지만,이는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한국이 대기업 천국이라는 말부터 엉터리다. 한국의 대기업 비중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훨씬 낮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G7 국가중 국부(國富) 데이터가 산출되는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과 한국 자산 상위 100대 기업의 경제력 집중도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분명해진다.

이 분석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의 국민순자산(국부) 대비 상위 100대 기업의 자산총액 비중은 17.7%에 그친다. 비교대상인 영국(44.9%), 독일(27.7%), 프랑스(23.1%), 이탈리아(19.5%)보다 훨씬 낮다. 국가 전체 자산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는 의미다. 한국은 대기업 비중도 시간이 지날수록 줄고 있다. 한국의 국부 대비 100대 기업의 자산 비중은 2010년 20.2%에서 2019년 17.7%로 2.5%포인트나 줄었다. 같은 기간 영국(11.0%포인트) 독일(1.3%포인트)은 100대 기업의 자산비중이 높아졌다. 이탈리아(-1.5%포인트)나 프랑스(-0.3%포인트)는 낮아졌지만 하락률은 한국에 크게 못 미친다. 한국 100대 기업의 경제력 집중도가 가장 빠르게 낮아진 것이다.

한국의 대기업 경제력 집중도가 높고 이것이 한국경제의 최대 약점이라는 주장도 사실과 정반대다. 한국의 전체 기업 자산총액에서 100대 기업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5년 47.5%에서 2019년 31.6%로 15.9%포인트 급락했다. 대기업 경제력 집중도가 급감했다는 의미다. 전체기업수 대비 대기업수 비중도 한국은 0.08%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4개국 중 33위에 불과하다. 대기업 비중이 가장 높은 스위스(0.83%)의 9분의 1 수준이다. 미국 뉴질랜드 등이 스위스의 뒤를 잇고 있다.

대기업의 오너체제나 순환출자를 문제삼이 기형적인 지배구조라 공격하는 것도 방향착오다. 외국과 달리 오너일가가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편법에 의존한다는 주장이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소위 '피라미드형 오너경영체제'는 글로벌 스탠더드라 불러도 될 만큼 전세계 기업들의 가장 보편적인 지배구조다. 오히려 전문경영인 체제가 미국과 영국의 대기업들에서만 목격되는 예외적 모델이다. 해외 기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던 시절 누군가의 과장과 악의가 보태지면서 오해가 확산됐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물론 경영효율성 측면에서도 전문경영인 체제가 우월하고 오너경영체제는 열등하다는 증거도 전혀 없다. 한국 대기업들의 성공이 입증한 오너체제의 장점과, 단기성과에 매달릴수 밖에 없는 전문경영인체제의 한계에 대한 지적과 논의가 활발하다. 대기업이 불공정 경쟁으로 자원배분을 왜곡한다며 민주적 통제하에 둬야 한다는 식의 일방적 주장도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상당수 대기업이 매출의 90% 안팎을 해외에서 일으키고 있고, 경쟁의 범위가 전세계로 확산된 마당에 시대착오적 규제이라는 비판이다.

지금은 대부분 해소된 순환출자 역시 한국 대기업만의 꼼수라는 시각은 부당한다. 도요타 도이치뱅크 LVMH 등 무수히 많은 글로벌 기업이 애용하는 방식일 뿐이다. 오히려 전세계에서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대기업에 의한 낙수효과가 실종됐다는 주장 역시 비상식적이다. 신문만 펼쳐봐도 대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사례가 차고 넘친다. 대기업과 거래가 많을수록 실적 개선 폭이 크다는 낙수 효과 입증 연구도 부지기수다.

대기업을 악마화하는 것은 경제에 대한 '나쁜 정치'의 부당한 관여다. 대기업 때문에 성장이 안되고 분배도 왜곡되며 대기업에 의한 성장은 '나쁜 성장'이라는 주장에선 선동의 냄새가 짙다. 대기업은 ‘성공한 중소기업’의 다른 이름일 뿐인 만큼 중소기업의 대기업 성장은 적극 지원할 일이다. 세계무대에서 경쟁하며 수익을 내고 고용을 창출하며 우리 경제를 살찌우는 대기업이 더 많이 등장하도록 격려하는 방향으로의 정책전환이 시급하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