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인텔과 결별을 선언했다. 지난 23일 세계 개발자 회의에서 "자체 설계한 CPU(중앙처리장치)를 이르면 연말 출시할 맥(Mac) 컴퓨터에 탑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새로운 반도체 이름은 '애플실리콘'이다.
14년 만에 인텔과 결별…"CPU 자체 개발"

PC 제품 개발·출시에 대한 주도권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분석된다. 자체 개발한 CPU를 쓰게 되면 인텔의 제품 개발·출시 일정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애플 제품간 운영체제 호환성도 높일 수 있다. 애플의 강점은 'iOS'라는 운영체제다. 맥 제품에도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워치와 같은 iOS를 구동하게 해 기기 간 통합성을 높이고 '애플 생태계'를 강화하기 위한 포석도 있다.

유진투자증권에 따르면 1984년 애플의 CPU 공급사는 모토로라였다. 모토로라가 핸드폰 사업에 집중하게되면서 1994년 IBM이 애플의 파트너가 된다. IBM 제품 성능이 인텔에 뒤처지면서 2006년 애플은 IBM 대신 인텔과 협력 관계를 구축한다.

14년 만에 인텔과의 결별을 택한 애플의 과감한 도전은 스마트폰에서 CPU 역할을 하는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개발에서 얻은 자신감 때문이다. 애플은 영국 ARM 설계 기반으로 자체설계한 AP 'A'시리즈를 아이폰에 넣고 있다. 성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 받고 있다. 예컨대 아이폰12에 탑재 예정인 A14 바이오닉 프로세서는 대만 TSMC의 최신 5nm(나노미터) 공정에서 생산되는데, 전력효율과 성능이 전작 대비 20~30% 이상 향상됐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NH투자증권은 보고서에서 "ARM 아키텍처의 성능이 인텔 X86에 근접했고 칩을 제조할 TSMC의 공정 능력이 인텔 공정을 능가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2019년 기준 스마트폰 AP시장 점유율. 한경DB
2019년 기준 스마트폰 AP시장 점유율. 한경DB
애플은 사실 오래 전부터 '반도체 사업'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었다. 2008년 팹리스(설계 전문 업체) 팔로알토 세미컨덕터(2억7800만달러), 2011년 플래시메모리 기업 아노비트(5억달러), 2018년 전력반도체 전문 업체 다이얼로그(6억달러), 2019년 인텔 모뎀칩사업부(10억달러) 등을 인수하며 역량을 축적해왔다.

인텔의 애플 매출 비중은 약 7%대로 추정된다. 애플의 독립선언으로 인텔은 연 50억달러(약 6조원)에 달하는 매출 손실이 예상된다. 반사이익은 고스란히 TSMC 몫이 될 전망이다. 애플이 자체 설계한 칩 생산을 TSMC에 맡길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TSMC가 연 10조원 정도 매출을 올려주는 중국 화웨이와 관계를 끊으라는 미국 정부의 요구를 수용하고서도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애플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TSMC가 미국에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공장을 짓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에도 Mac용 반도체 생산 맡길까

삼성전자에 미칠 영향은 없을까. 2000년대부터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해도 삼성전자와 애플은 반도체와 관련해선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2000년대 초반 아이폰 출시를 구상하고 있던 스티브 잡스와 당시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이끌었던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이 '아이폰 AP 공동개발', '삼성전자가 AP 전량 공급' 계약을 맺은 영향이 컸다. 이후 2007년 1세대 아이폰 AP부터 아이폰4S에 들어간 AP인 'A5'까진 두 회사가 사실상 함께 만든 것이다. 생산은 전략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장에서 이뤄졌다.
2004년 7월 당시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왼쪽)이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파운드리공장 증설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경DB
2004년 7월 당시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왼쪽)이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파운드리공장 증설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경DB
애플은 삼성과 협력하면서도 자체적으로 반도체 설계 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08년 팹리스(설계 전문 업체) 팔로알토 세미컨덕터(2억7800만달러)를 인수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그즈음 애플이 삼성전자 AP 설계 관련 핵심인력을 무더기로 빼가서 두 회사의 갈등이 고조되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두 기업 간 스마트폰 특허 분쟁이 불거졌다. 반도체 밀월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삼성전자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애플은 2012년 아이폰6용 AP 파운드리 업체를 삼성전자에서 대만 TSMC로 돌렸다. 2014년 A8 프로세서 물량을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맡는 등 일부 협력 관계는 유지했지만 과거와 같은 긴밀한 관계는 끊어졌다.

현재까지도 애플은 삼성전자 파운드리보다 TSMC를 선호하는 모습을 이어오고 있다. 스마트폰 시장의 강력한 경쟁자인 동시에 반도체 설계(엑시노스 등)도 하고 있는 삼성전자에 '설계 유출'을 우려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반도체 후공정 업체의 한 고위 관계자는 "애플은 설계 보안을 유지할 수 있는 '애플 전담' 인력을 요구하고 직원이 수시로 공장에 나와 감시할 정도로 '기술 유출 방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가 분리됐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생산을 맡기기에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2019년 5G 모뎀칩 조달에 실패한 애플이 삼성전자에 'SOS' 신호를 보냈지만 삼성이 외면한 것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다는 얘기도 있다. 그해 4월께 삼성전자는 엑시노스5100 등 5G 모뎀칩을 활용해 갤럭시S10 등 5G 스마트폰을 출시했다. 당시 애플은 5G 모뎀칩을 구하지 못해 발만 구르는 상황이었다. 협력사인 인텔의 5G 모뎀칩 개발이 지연됐고 5G 모뎀칩을 갖고 있던 퀄컴은 '특허 남용' 관련 법정 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당시 전략적인 판단으로 애플에 5G 칩을 공급하지 않았고 궁지에 몰린 애플은 결국 퀄컴과 눈물을 머금고 특허분쟁에 합의하게 된다.

현재로선 삼성전자가 애플의 '탈(脫) 인텔' 움직임에 따른 반사이익을 볼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반도체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다만 파운드리 사업과 관련해선 3nm 등 차세대 초미세공정에서 TSMC보다 고성능·저전력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삼성전자에도 희망이 있다. '이익'이 된다면 과거 앙금도 훌훌 털어버리고 협력하는 게 기업의 생리다.
그래서 반도체 업계에선 "기술력을 키우면 삼성전자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근 반도체 사장단 회의에서 5nm 파운드리 공정, 'GAA' 기술 등을 언급하고 "미래기술을 얼마나 우리 것으로 만드느냐에 생존이 달려있다. 시간이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