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경영권 승계 과정을 둘러싼 의혹으로 또다시 구속 기로에 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입을 굳게 닫은 채 순식간에 법정으로 들어갔다.

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는 이 부회장은 이날 오전 10시경 검은 양복과 회색 넥타이 차림에 마스크를 쓴 채 검은색 차량에서 내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앞만 보고 걸어갔다.

'불법 합병'을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적이 있는지, 3년 만에 영장실질심사를 받게 된 심경이 어떤지 등을 묻는 취재진 질의에는 답변하지 않았다.

이 부회장을 시작으로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 팀장, 김종중 전 미전실 전략팀장도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차례로 서울중앙지법에 들어섰다.

이 부회장이 모습을 드러내자 조용했던 포토라인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라인에 있던 일부 시위대는 "이재용을 구속해라" "삼성을 구속해라" 등의 구호를 외친 반면 "이재용 부회장 힘내세요" "삼성 힘내라" 등의 응원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법원에 따르면 앞선 검찰 소환 당시 두 차례 출석에선 모두 비공개 조사를 받았던 이 부회장은 이날 다시 포토라인에 섰다. 지난해 10월 국정농단 사건 파기항소심에 출석한 지 8개월 만이다.

이 부회장이 법원의 영장 실질심사를 받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할 경우 이 부회장은 2년4개월만에 다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날 영장실질심사는 원정숙(46·사법연수원 30기)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맡는다. 원 부장판사는 텔레그렘 n번방 사건의 주범인 '박사' 조주빈의 영장실질심사를 맡아 당시 조씨와 n번방의 또 다른 관계자 최모씨에게 영장을 발부한 바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 사진=최혁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 사진=최혁 기자
이 부회장의 구속 여부는 합병 당시 삼성 측 주가 방어가 이 부회장을 위한 것이었는지, 시세 조종과 분식회계 등에 이 부회장이 직접 관여했는지 등을 검찰이 입증하느냐에 달려있다. 삼성 수사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검찰 측은 이 부회장 수사를 담당한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 이복현(48·사법연수원 32기) 부장검사와 최재훈(45·35기) 부부장 검사, 의정부지검의 김영철(47·33기) 부장검사 등 수사팀 대부분이 나선다. 이 부장검사는 2016년 12월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파견돼 국정농단 수사를 한 경험이 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의혹 수사에도 관여한 인물이다.

검찰은 이 부회장이 혐의를 전면 부인해왔다는 점, 그룹 총수 지위를 이용해 증거인멸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구속수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물산 등 회사가 손해를 입은 과정을 입증하기보단 합병 자체가 자본시장 질서를 해친 부정거래였다고 설명하는 전략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부회장의 변호인단은 한승(연수원 17기) 전 법원장을 포함해 부장판사 출신 고승환 변호사(연수원 32기)와 법률사무소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이 등 10여명이 투입된다. 이 부회장의 검찰 수사 단계에서 변호를 맡았던 특수통 검사장 출신 이동열·김기동 변호사는 참석하지 않는다.

이 부회장 측 변호인단은 이 부회장이 합병과 관련해 불법적인 내용을 보고 받거나 지시한 적 없고 글로벌 기업 경영자로 도주 가능성이 사실상 없다는 점, 오랜 수사로 대부분 관련 자료가 수집됐다는 점 등을 들어 구속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또 삼성이 최근 잇따른 일부 언론 보도 반박문과 호소문을 통해 밝힌 것처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관련 법 규정과 절차에 따라 이뤄진 것이며,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처리도 국제 기준에 맞춰 처리됐다는 반박 등도 다시 한 번 강조할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배성수 한경닷컴 기자
사진=배성수 한경닷컴 기자
이 부회장 측과 삼성은 모든 관련 혐의를 부인한 상태다.

만약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하면 영장 청구에 앞서 이 부회장 측이 요청한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소집 신청' 카드는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크다. 법원이 구속 필요성을 인정한 상황에서 외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수사심의위가 불기소 의견을 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부회장 영장이 기각될 경우 '무리한 수사'를 주장해온 삼성 측 입장에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수사심의위까지 신청한 상황에서 이뤄진 구속영장 청구는 검찰권 과잉행사라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검찰 측의 이 부회장에 대한 수사기록이 400권(20만쪽)에 달하고 구속영장이 무려 150쪽 분량에 달하는 만큼 이 부회장 등에 대한 구속 여부는 이르면 이날 늦은 오후나 9일 오전 일찍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배성수 한경닷컴 기자 baebae@hankyung.com
사진=최혁 한경닷컴 기자 choko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