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증시가 연이틀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국제 유가도 함께 곤두박질쳤다. 4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10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배럴당 40달러가 붕괴됐다. /아람코(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 SNS  캡처
뉴욕증시가 연이틀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국제 유가도 함께 곤두박질쳤다. 4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10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배럴당 40달러가 붕괴됐다. /아람코(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 SNS 캡처
국제 유가가 한 달 새 배럴당 50달러 선에서 20달러까지 급락하면서 정유·조선·건설 등 국내 전통 산업들이 ‘수익 절벽’에 내몰리고 있다. 유가가 급락하면서 원유를 정제해서 생산한 휘발유 등 석유제품 가격이 원유 도입가격보다 더 낮아 손실을 보며 팔고 있는 데다 석유 관련 프로젝트가 줄줄이 취소돼서다.

러시아 정부가 2일 원유 추가 증산 계획이 없다고 밝히면서 이날 주식시장에서 정유주가 반짝 상승했지만 유가가 회복세로 돌아서긴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 등 국내 정유 4사는 지난달 중순부터 하루 최대 700억원씩 영업손실을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국내 정유사의 정제마진(석유제품 가격-원유 도입 가격)은 배럴당 -1.1달러로 제품을 만들수록 손해를 보고 있다. 이마저도 고도화 설비를 100% 적용했을 때를 가정한 숫자다. 오래된 설비가 대부분인 국내 정유회사들의 정제마진 악화는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게 정유업계 설명이다. 이를 고려하면 하루 250만 배럴가량의 석유제품을 생산하는 국내 정유사의 정제마진 손실 금액이 600억원에 달하고 재고와 원화가치 하락에 따른 환손실을 추가하면 700억원까지 치솟는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중동에서 원유를 수송하는 기간 동안 유가가 급락하고, 석유제품 가격은 더 떨어지면서 제품 판매 손실과 재고손실이 급격히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두바이유 기준 국제 유가는 지난 두 달 사이 반토막(약 48% 하락) 났다. 증권가에선 국내 정유업계 1분기 영업손실이 2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내 정유회사들은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갔지만 공장 가동률을 낮추는 것 외엔 딱히 대책이 없는 실정이다.

저유가 공포는 건설사와 조선업체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등 국내 건설사 해외 수주의 60%를 차지하는 중동 산유국의 플랜트 공사가 취소되거나 발주가 잇달아 연기되고 있다. 올해 1분기 세계 선박 발주량은 236만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로 1년 전(820만CGT)보다 71.2% 급감(클락슨리서치)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유가가 배럴당 50~60달러 선에서도 가물에 콩 나듯 하던 해양 플랜트 발주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했다.
"소상공인도 대기업도 보증 대폭 늘려줘야 코로나 위기 넘는다"

“석유제품 거래는 거의 중단된 상태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2014년 유가 급락 등 여러 위기를 겪어봤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입니다.”

국내 대형 정유회사 소속의 한 트레이더(중개인)는 2일 최근의 석유제품 시장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싱가포르에서 근무하고 있는 그는 “사자 주문이 없는 상태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다들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거래처를 만날 기회조차 없다”며 “시장 전체가 극심한 비관론에 휩싸여 있다”고 전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글로벌 수요 감소에 산유국들이 증산까지 나서면서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 가격이 18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서울의 한 금융정보제공업체 직원이 2일 국제 유가 그래프를 살펴보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글로벌 수요 감소에 산유국들이 증산까지 나서면서 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 가격이 18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서울의 한 금융정보제공업체 직원이 2일 국제 유가 그래프를 살펴보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모든 석유제품 수요 급감

국제 유가 하락은 통상 정유회사에 호재로 작용한다. 유가가 떨어지면 정유사들은 정제마진이 커져 수익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속도와 수요다. 최근처럼 유가가 두 달 사이 반토막 날 정도로 빠르게 떨어지거나 수요가 받쳐주지 않으면 정유회사는 생산할수록 손해를 보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국내 정유사들은 두 달 전 가격으로 중동지역으로부터 원유를 들여온다. 운반선을 타고 들어온 원유를 울산과 전남 여수 등 정유공장에서 정제해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을 생산해 판매한다. 원유가 한국으로 오는 사이 국제 유가가 반토막이 난 동시에 석유제품 가격이 급락하면서 정유회사는 마진이 마이너스로 돌아서고 재고손실까지 떠안아야 하는 이중고에 몰리고 있다.

저유가 쓰나미…정유 4社 하루 700억씩 손실
석유제품 중 항공유 시장은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코로나19로 전 세계 비행기들이 멈추면서 항공유 수요는 1년 전보다 70% 이상 급감했다는 게 업계의 하소연이다. 항공유는 오래 보관하면 제품이 변질돼 재고로 쌓아둘 수도 없어 국내 정유회사들은 해외에 ‘떨이’식으로 손해를 보면서 내다 팔고 있다. 한 대형 정유사 관계자는 “항공유 마진은 올초 대비 배럴당 3달러 정도 낮아졌다. 어쩔 수 없이 손실을 감수하며 처분하고 있는데, 2분기엔 더 떨어질 것이 확실시돼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이동이 줄고, 산업 생산과 전력 사용도 고꾸라지면서 휘발유와 경유 소비도 줄었다. 한국주유소협회는 지난달 25일 “코로나19가 시작된 올 2월 휘발유 소비가 1년 전보다 30% 이상 감소했는데, 3월엔 더 심할 것”이라며 산업통상자원부에 지원 요청서를 제출했다. 지난달 전력 예비율은 평균 40~50%대에서 움직였다. 전기 공급능력의 절반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지난해 같은 기간 전력예비율은 평균 20~30%선이었다.

재고 둘 곳 없어 운반선 용선가 폭등

국내 정유사들은 원유를 계속 정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공장 가동을 멈추면 재가동에 몇 달씩 걸리기 때문에 공장을 세울 수 없는 데다 이미 계약한 물량에 대해선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생산해야 하는 처지다.

석유제품 재고가 쌓이면서 재고 물량을 적재할 곳이 없어지자 원유 운반선의 용선 비용이 폭등하는 기현상도 등장했다. 사우디아라비아~울산 노선의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용선 비용은 지난해 줄곧 배럴당 1달러 안팎에서 움직였지만, 이달 1~2일엔 6.37달러까지 폭등했다.

정유회사 관계자는 “국내외 정유사들이 원유와 석유제품 재고를 넣을 데가 없어서 원유 운반선을 빌려 바다에 띄워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유업계 “한 곳 망해도 이상할 것 없다”

증권사들은 1분기 국내 정유 4사의 영업손실이 모두 2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정유부문)이 8900억원, GS칼텍스 5600억원, 에쓰오일 6700억원 등으로 추산된다.

국내 정유사들은 지난달부터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갔다. SK이노베이션은 정유 공장 가동률을 100%에서 85%로 낮췄고, 현대오일뱅크도 90% 수준으로 조정했다. GS칼텍스는 정기보수를 앞당겨 하고 있으며, 고연봉으로 ‘꿈의 직장’으로 불리던 에쓰오일은 희망퇴직 시행을 검토 중이다.

실적 악화는 정유회사들의 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자금 조달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지면서 기업어음(CP) 발행에 나설 정도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달 말께 2750억원 규모의 CP를 발행한 데 이어 현대오일뱅크도 최근 비슷한 액수의 CP를 발행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지금의 시황이 개선 없이 지속된다면 정유사는 가동률을 최대 50%까지 낮추거나 공장을 끄는 것도 고려할 것”이라며 “이 상태로 몇 달만 지속하면 정유사 한 곳이 도산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김재후/윤아영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