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으로 글로벌 위기 가능성이 고조되면서 과거 위기 때처럼 외화 유동성 부족 사태가 재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위기가 불거진 직후 외국인 자금이 국내 시장을 이탈하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다. 이어 금융권의 외화 유동성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달러를 구하는 데 애를 먹은 은행들이 기업 등에 빌려줬던 외화를 회수하고, 수출환어음 매입도 크게 줄였다. 이 때문에 기업들이 더 어려움을 겪고, 실물경제가 악화돼 금융 부실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졌다.최근 외환시장과 채권시장에서도 당시와 같은 ‘달러 가뭄’ 징후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16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13일 원·달러 스와프포인트 1개월물 가격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외환스와프는 은행 간 원화를 담보로 달러를 빌려주는 거래를 말한다. 달러 여유분이 있는 은행이 이자를 받고 달러 자금이 부족한 은행에 달러를 빌려준다. 스와프포인트가 마이너스라는 얘기는 달러를 구하려는 수요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기업들도 달러 조달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해외 투자자들이 신흥국 회사채에 대한 투자를 꺼리고 있어서다. 아시아 투자적격 회사채와 미 국채 간 금리격차는 코로나19 확산 본격화 전인 지난 1월 20일 1.16%포인트에서 지난 13일 1.90%포인트로 벌어졌다.기업의 자금 조달 차질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대한항공이 지난달 3억달러 규모 영구채(신종발행증권) 발행을 미룬 것을 시작으로 한국광물자원공사(3억호주달러)와 한국석유공사(5억달러) 등이 연이어 해외 채권 발행 시기를 연기했다. 투자은행(IB)업계에선 우량한 신용을 갖춘 석유공사마저 자금 조달 일정을 미루자 코로나19 충격이 기업 외화 조달 환경 전반으로 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석유공사의 글로벌 신용등급은 한국 정부와 같은 ‘AA’로 평가받고 있다.외화 유동성 부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학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대응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16일 브리핑에서 “미국을 비롯한 주요 20개국(G20) 국가들과 통화 스와프를 적극적으로 체결하는 것을 정부에 제안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국은 2008년 2600억달러 수준이던 외환보유액이 2005억달러까지 줄어들자 300억달러 규모의 한·미 통화스와프를 체결해 외환시장을 방어했다.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
한국은행이 16일 임시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기준금리를 연 1.25%에서 사상 최저인 연 0.75%로 끌어내렸다. 이번 인하로 한국 경제도 ‘0%대 금리 시대’가 열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영향으로 경제위기 발생 가능성이 커지자 이에 대한 대응 차원이다.한은이 금리를 한꺼번에 0.5%포인트 낮추는 ‘빅컷’에 나선 것은 금융위기 막바지이던 2009년 2월 후 처음이다. 한은이 통화정책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코로나19 관련 추가경정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17일을 앞두고 전격 인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15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내린 것도 한은 금리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이주열 한은 총재는 이날 금리 인하 배경에 대해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면서 금융시장 변동이 커졌다”며 “금융시장 변동성을 완화하고 성장과 물가에 대한 파급 영향을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할 뜻도 내비쳤다. 이 총재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충격이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실물은 물론 금융으로 퍼질 가능성도 있다”며 “모든 수단으로 적절히 대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韓銀, 코로나 위기 긴급처방…'급한 불' 끌까한국은행이 임시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금리를 내린 것은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9월(0.5%포인트 인하)과 글로벌 금융위기가 촉발된 2008년 10월(0.75%포인트 인하) 두 차례뿐이었다. 12년 만에 임시 금통위가 열린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충격이 금융위기 수준과 비슷하다는 판단에서다. 한은의 결정으로 ‘0%대 금리 시대’가 열렸다. 코로나19 충격이 더 커질 경우 한은이 실효하한 금리(유동성 함정이나 자본유출 등을 고려한 기준금리의 하한선)를 고려해 국채 매입 등 양적완화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는 일각의 전망도 나온다.통화·재정정책 공조 차원한은은 16일 오후 4시30분 임시 금통위를 열고 기준금리를 연 1.25%에서 연 0.75%로 0.5%포인트 낮췄다. 7명의 금통위원 중 임지원 위원만 ‘0.25%포인트 인하’ 소수의견을 냈다. 한은이 임시 금통위를 개최한 것은 코로나19 충격으로 올해 1분기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 확실시되는 등 침체 속도가 가속화하고 있다고 판단해서다.미국 중앙은행(Fed)이 15일(현지시간) 긴급 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기존 연 1.00~1.25%에서 연 0~0.25%로 1%포인트 내린 것도 한은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과 미국 기준금리 차이가 커지면서 자본유출 가능성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코로나19 관련 추가경정예산안이 17일 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한은도 기준금리 인하로 보조를 맞춰 ‘정책 조합(policy mix)’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결정으로 풀이된다.한은이 기준금리를 추가로 낮추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연 0.75%인 기준금리가 실효하한 수준이라는 분석이다. 더 낮출 경우 부동산시장을 자극하거나 외국인 투자자들의 자금유출이 한층 가속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준금리 인하 대신 국채를 추가 매입하는 등의 방식으로 양적완화에 나설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한은은 중소업체를 지원하기 위한 대출제도인 금융중개지원대출 금리도 연 0.50~0.75%에서 연 0.25%로 낮췄다. 국채 등으로 좁힌 공개시장운영 대상 증권 범위도 산업금융채권, 중소기업금융채권 등으로 넓히기로 했다. 공개시장운영은 한은이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증권 등을 사들여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제도다.“향후 통화정책 운용 폭 줄었다”한은의 전격적인 금리 인하에도 전문가들은 시장에 미치는 효과는 크지 않을 것으로 봤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0.5%포인트 이상 ‘빅컷’을 한 상황인 데다 한은도 최근 임시 금통위 개최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어 금리 인하 효과가 시장에 상당 부분 반영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히려 이번 금리 인하로 향후 통화정책의 운용 폭이 크게 줄어 역효과를 낼지 모른다는 분석도 나온다.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글로벌 증시 급락은 시장 유동성이 적어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며 “금리 인하가 증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고 내다봤다.김 센터장은 “미국은 기축통화국이다 보니 제로(0) 수준까지 금리를 과감히 떨어뜨리고 양적완화까지 병행할 여력이 되지만 우리는 추가 금리 인하가 쉽지 않다”며 “이번 금리 인하가 사실상 끝이라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저금리 시장에서 활력이 떨어지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 같은 점 때문에 채권시장에 미치는 파장도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채권 금리를 다소 떨어뜨릴 수는 있지만 최근의 단기 오름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는 진단이다.박석길 JP모간 본부장은 “금리 인하가 한계 상황에 놓인 기업들을 돕는 효과는 있겠지만 시장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며 “한은도 이 같은 점 때문에 2월 금통위에서 금리를 동결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서강대 석좌교수)은 “내수 경기 부양이나 기업 투자 확대를 이끌기에는 역부족”이라며 “가계 부채를 늘리고 부동산시장을 자극하는 등 역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김익환/고경봉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