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월 LG CI 선포식을 마친 뒤 당시 구자경 회장(왼쪽 세번째)과 구본무 부회장(왼쪽)이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표지석 제막식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1995년 1월 LG CI 선포식을 마친 뒤 당시 구자경 회장(왼쪽 세번째)과 구본무 부회장(왼쪽)이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표지석 제막식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상남(上南)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10시경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구 명예회장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장남으로, 1925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구 명예회장은 LG그룹 창업 초기이던 1950년 스물 다섯의 나이에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주식회사에 입사했다.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45년간 기업 경영에 전념하며 원칙 중심의 합리적 경영으로 LG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교사에서 경영자로 변신

구 명예회장은 원래 교사였다. 1945년 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다 1947년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의 화장품 사업이 날로 번창해 일손이 모자라자 LG에 입사했다. 구 명예회장은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부친의 사업을 도우며 지냈다. 그러던 중 아예 회사에 들어와 사업을 도우라는 부친의 부름에 1950년 교편을 놓고 본격적으로 기업인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구 명예회장은 ‘이사’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가기도 했다. 밤에는 하루걸러 숙직을 하며 아침 5시 반이면 몰려오는 도매상들을 맞았다.

구 명예회장은 십 수년 공장 생활을 하며 ‘공장 지킴이’로 불릴 만큼 현장 수련을 오래 했다. 사람들이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에게 “장남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할 정도였으나, 창업회장은 “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수 없는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며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

구 명예회장이 여느 2세 경영인과는 달리 창업과 성장을 함께 주도한 1.5세대 경영인으로 평가 받는 이유다.

재임 기간 중 1150배 매출 성장

구 명예회장은 45세가 되던 1970년 1월 9일 LG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이 62세를 일기로 1969년 12월 31일 타계한 직후다. 20년간 생산현장을 지키다 서울로 근무지가 바뀐 지 불과 1년여 만에 부친의 유고로 마음의 준비 없이 회장 자리에 올랐다.

구 명예회장이 25년 간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그룹은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다. 임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증가했다.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지금과 같은 LG그룹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

최초의 기업 연구소 설립하고 1호 상장

구 명예회장은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신념으로 기술 연구개발에 승부를 걸었다. 그는 늘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하여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토록 했다. 이후 회장 재임기간 동안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는 “연구소만은 잘 지어라. 그래야 우수한 과학자가 오게 된다”고 했다.

구 명예회장은 기업공개를 통해 민간 기업의 투명경영을 선도했다.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 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곧 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이후 금성통신(1974), 반도상사·금성전기(1976), 금성계전(1978), 럭키콘티넨탈카본 (1979) 등 10년간 10개 계열사의 기업공개를 단행해 안정적인 자금 조달을 통한 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
1999년 구자경 LG 명예회장(왼쪽)과 구본무 LG 회장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  /LG 제공
1999년 구자경 LG 명예회장(왼쪽)과 구본무 LG 회장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 /LG 제공
최초의 무고 승계

구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LG와 고락을 함께 한 지 45년, 회장으로서 25년 만이다.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됐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철저하게 평범한 자연인으로서 살았다. 주로 충남 천안시 성환에 위치한 연암대학교의 농장에 머물렀다. 버섯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 열성을 쏟으며 하루하루 바쁜 일정을 보냈다.

은퇴 후 모교인 지수초등학교 후배들의 서울 방문을 직접 챙기기도 했다. 떠날 때는 사진을 같이 찍고 선물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또 어린 학생들이 장거리 여행에 지쳐 멀미할 것을 걱정하여 직접 멀미약을 챙겨준 것이 인상적이었던지 학생들이 감사 편지를 보내온 적도 있었다.

LG 관계자는 “구 명예회장은 기업경영의 정도(正道)를 잃지 않았고, 언제나 남보다 앞선 생각, 과감한 결단으로 우리 경제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던 큰 기업인이었다”며 “회장으로 25년간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오늘날 LG를 일궈낸 경영인”이라고 말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