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수천억원 규모의 대출 손실을 미리 보전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한 것으로 14일 드러났다. 정부는 산은 요구를 받아들여 지난 4월 6조7000억원 규모로 편성한 올해 추가경정예산(추경)에 산은 출자금 1050억원을 포함했다.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발생하지도 않은 손실을 메워 주기 위한 추경 편성은 국가재정법을 정면 위반하는 것”이라며 예산 전액 삭감을 주장했다.
서울 여의도에 있는 산업은행 본점 전경. /한경DB
서울 여의도에 있는 산업은행 본점 전경. /한경DB
정부가 4월 말 국회에 제출한 추경안에 따르면 산은 소관 부처인 금융위원회는 추경으로 편성된 1조1168억원 중 1050억원을 산은의 자본 확충(증자)에 쓰기로 했다. 산은의 출자 요구에 따른 것이다.

산은은 정부가 작년 말 발표한 ‘2019년 경제정책 방향’에 따라 올해 중견·중소기업에 3조4000억원 규모의 신규 대출을 해주기로 했다. 사업 구조 개편과 해외 진출, 기술개발·도입 등을 돕는 ‘산업구조 고도화 프로그램’에 2조4000억원, 노후 설비 교체 지원사업인 ‘환경·안전 투자 프로그램’에 1조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산은은 올해 두 사업 시행에 따른 손실액이 2000억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정부 계획대로 3조4000억원 규모 대출이 전부 이뤄지고, 지원 대상 기업의 파산 등으로 인해 대출금의 6%는 회수하지 못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미회수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1050억원을 정부가 출자 형태로 보전해 달라는 게 산은 요구의 골자다. 산은은 이들 사업에 내년과 후년에도 2조3500억원씩을 쏟아부을 예정이다.

지난달 금융위 추경안을 내부적으로 심사한 한국당은 “아직 현실화하지 않은 대출 손실을 메워 주기 위해 예산을 편성하는 것은 추경의 선(先)집행을 금지한 국가재정법(제89조) 위반”이라고 문제 삼았다. 산은 관계자는 “과거에도 기업 대출 프로그램 관련 손실을 정부 예산으로 선보전해준 사례가 있다”고 해명했다.

국회예산정책처도 산은에 대한 정부 출자에 제동을 걸었다. 대출로 인한 손실 발생 가능성이 거의 없는 데다 설령 그 정도 손실이 난다 해도 정부가 자본 확충을 해줘야 할 정도로 산은의 재무 건전성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산은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자기자본/위험자산)은 지난 3월 말 기준 14.91%로, 금융감독원 권고치(13%)를 크게 웃돌고 있다. 산은은 “한국GM과 STX조선해양 등 부실기업 자금 지원 과정에서 손실을 봤다”며 3월에도 정부로부터 4000억원의 출자금(올해 본예산에 포함)을 받았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이번 산은 대출 사업의 실효성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등 다른 부처가 시행 중인 중견·중소기업 대출 사업과 지원 대상이 중복된다는 이유에서다. 국회예산정책처 관계자는 “산은 프로그램은 다른 부처 지원사업보다 대출금리가 연 1~2%포인트 높아 기업들이 대출을 신청할 매력이 떨어진다”며 “정부 출자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난 1월 말 산은의 대출 프로그램 시행 후 5월까지 누적 대출액은 3192억원으로, 연간 목표치(3조4000억원)의 10%에도 못 미쳤다.

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