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목의 선전狂시대] 주류 판매 뛰어든 中 전자업체 하이얼
하이얼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중국 가전업체다. 매출 등 규모에서는 메이디나 거리에 뒤진지 오래지만 일찍부터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덕분에 해외 브랜드 가치는 경쟁사를 압도한다. 하이얼이 2005년 한국에 시판한 와인 냉장고는 때맞춰 불어닥친 와인열풍과 높은 가성비로 주목을 받았다. ‘짝퉁’이 아닌 중국 전자제품에 한국인들이 처음 주목하게 된 것도 이 와인 냉장고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하이얼이 주류 유통업에 진출했다. 말 그대로 와인과 고량주 등을 제조사로부터 공급 받아 식당과 호텔 등에서 판매하는 것이다. 한국 진출 때와 마찬가지로 주류 전문 냉장고가 이번에도 비장의 무기가 됐다.

정체는 ‘지우쯔다오(酒知道·술을 안다)’라는 이름의 하드웨어(HW) 및 소프트웨어(SW) 플랫폼이다. 하이얼이 식당과 호텔 등지에 공급하는 주류 냉장고에는 A4용지 2장 정도 크기의 디스플레이가 내장돼 있다. 고객은 디스플레이를 통해 주류 냉장고에 입고돼 있는 술의 종류와 유통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스마트폰에 지우쯔다오 애플리케이션을 다운 받으면 음식과 자리의 성격에 따라 알맞는 와인을 추천 받을 수도 있다.
[노경목의 선전狂시대] 주류 판매 뛰어든 中 전자업체 하이얼
2016년부터 관련 사업을 시작한 하이얼은 베이징 시내에만 2351개, 중국 전체에 10만개 이상의 지우쯔다오 주류 냉장고를 보급했다. 냉장고 하나 하나가 술을 판매하는 거점이 되는 셈이다.

지우쯔다오는 중국 내에서 주류 판매자와 고객이 느끼는 불편함을 정확히 파고 들었다. 중국에서는 식당에 고객이 자신의 술을 들고 와도 식당에 비용을 내는 콜키지 문화가 없다. 때문에 중국 내 식당에서 소비되는 술의 80% 이상은 고객이 가져온 술이라는 것이 하이얼의 자체 조사 결과였다. 와인의 경우에는 이같은 현상이 더 심해져 90% 이상에 달했다.

식당 주인 입장에서는 큰 손해로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고객들 입장에서도 할말은 있다. 워낙 가짜 술이 많아 식당에서 파는 술을 믿기 힘들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파는 술은 믿지 못하니 스스로 믿을 수 있는 술을 준비해 가겠다는 것이다.

지우쯔다오는 제조자로부터 정보를 받아 술의 출고 시기와 유통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고객이 따로 구매하는 것보다 더 높은 신뢰도를 가진다. 판매 가격의 일정 부분을 식당에 제공하는 만큼 식당 주인 입장에서도 이득이다. 제조자와 직접 거래하면서 유통 단계를 대폭 줄여 술 판매가격도 낮췄다.
[노경목의 선전狂시대] 주류 판매 뛰어든 中 전자업체 하이얼
하이얼은 이미 해당 서비스 부문을 지우쯔다오라는 이름의 자회사로 독립시켰다. 이 회사는 네트워크를 더욱 확대하며 매출을 늘려 올해나 내년에 독자 증시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우쯔다오 탄생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2014년 하이얼 와인 냉장고 제조부서는 베이징의 한 고객으로부터 100병 이상의 와인이 들어가는 대형 냉장고를 제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냉장고를 만들어준 해당 부서는 이 고객을 만나보기로 했다. 100병 이상의 와인을 보관할 정도의 와인 전문가에게 와인 냉장고 성능 개선을 위한 조언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당 고객은 예상과 상반된 답을 내놨다. “저는 와인을 전혀 모릅니다. 다들 저보고 벼락부자라고 하기에 품격 있는 부자들은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다 와인을 많이 구매하게 됐을 뿐입니다. 와인을 수백병 수집했지만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하이얼이 이런 불편을 해결해줄 수는 없나요.”

이같은 고객의 요구에 따라 2015년 대형 디스플레이를 장착한 와인 냉장고가 처음 만들어졌다. 고객은 디스플레이를 통해 자신이 구매한 와인에 대해 정보를 언제든 조회할 수 있게 됐다. 어떤 손님을 어떤 자리에 모시느냐에 따라 필요한 와인을 추천하는 기능도 추가됐다. 이듬해 이를 업그레이드해 주류 판매 기능까지 도입한 것이 지금의 지우쯔다오다.

하이얼의 이같은 성공은 HW업체들이 모바일 시대에 어떻게 기회를 잡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곳곳에 설치된 하드웨어 하나하나를 플랫폼으로 연결한다면 SW만으로 구성된 플랫폼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선전=노경목 특파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