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로머 뉴욕대 교수가 27일 서울 세종대로 상의회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폴 로머 뉴욕대 교수가 27일 서울 세종대로 상의회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로머 뉴욕대 교수는 27일 “최저임금 인상이 노동 수요를 감소시켜 근로자의 일자리를 빼앗아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이날 서울 상의회관에서 연 ‘혁신성장, 한국 경제가 가야 할 길’이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다. 그는 “최저임금 인상 정책으로 고용시장에서 실업자 수가 늘어났다면 (이 정책으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로머 교수는 기술혁신이 성장을 이끈다는 ‘내생적 성장이론’으로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일자리 창출은 민간의 역할

로머 교수는 한국 정부가 추진 중인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타당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일자리’를 지목했다. 그는 “소득주도성장은 정부가 보조금 지급 등을 통해 추진하는 경기 진작 정책의 일종”이라며 “이미 여러 나라에서 시도했던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정책 시행 결과는 잘 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했다”며 “이 정책으로 실업자 수가 줄어들었다면 괜찮지만 되레 늘어났다면 문제”라고 했다.

그는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정부 정책보다 민간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머 교수는 항공산업을 예로 들면서 “정부는 소수의 담당자를 고용해 항공산업의 안전 규제 등을 만들고 지키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항공산업 일자리의 대부분은 민간 항공사가 창출해낸다”고 설명했다.

좋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선결 과제로는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를 첫손에 꼽았다. 로머 교수는 “정규직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키우는 것이 하나의 대책이고 해답이 될 수 있다”며 “유연성이 늘어나면 새로운 고용이 생겨나고 젊은 세대는 일자리를 찾을 기회를 얻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른 일자리로 옮겨가는 것 자체가 쉬워져야 하고, 고용주 입장에서 제약이 있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기존 성장전략 재편해야”

정부가 주도하는 공공 일자리 정책에 대해서는 “일자리인 척하는 일자리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로머 교수는 “사람들에게 돈을 줄 때는 신중해야 한다”며 “일은 실질적인 생산성이 있어야 하고 특정 인원이 얼마만큼 일할 수 있는지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선진적인 노사관계 구축을 위해선 정부가 노사 갈등에 개입해 잘잘못을 가려선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수십 년간 기업 활동을 이어온 조직에선 과거에 했던 약속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정부는 기업의 약속 이행 여부를 확인하기보다는 노사가 새로운 협정을 맺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로머 교수는 한국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분석과 조언을 했다. 그는 “한국은 지난 수십 년간 고성장, 높지 않은 실업률, 활발한 소득계층 이동성을 바탕으로 매우 빠른 경제발전을 이뤄냈지만 최근엔 성장 속도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둔화돼 기존 성장전략을 재편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고 진단했다. 이어 “경제의 지속성장은 노동, 자본과 같은 양적 투입보다 인적 자본, 기술 등과 같은 질적 변화에 달려 있다”며 “국가는 인적 자본을 확충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일을 통해 학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선순환적 성장구조’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로머 교수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기업 현장에서 지식을 쌓고 공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며 “이렇게 축적된 지식이 새로운 기술과 사업모델을 탄생시키는 선순환적 성장구조를 만들어야 혁신을 촉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머 교수는 “여성 인력의 활용을 늘려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한국엔 고학력 여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잘 활용되지 않았다”며 “여성 인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해 잠재 자원으로 남아 있는 현 상황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