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어재단이 1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 뱅커스클럽에서 ‘한국의 산업생태계와 혁신성장’을 주제로 시사포럼을 열었다. 오른쪽부터 차국헌 서울대 공과대학장, 안충영 중앙대 석좌교수,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 장관, 장지상 산업연구원장,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니어재단이 1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 뱅커스클럽에서 ‘한국의 산업생태계와 혁신성장’을 주제로 시사포럼을 열었다. 오른쪽부터 차국헌 서울대 공과대학장, 안충영 중앙대 석좌교수,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 장관, 장지상 산업연구원장,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는 1999년 “한국 기업은 핵심 부품을 생산하지 못할 것이며 절대 선진국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글을 일본 잡지에 실었다. 외국에서 부품을 대량 수입하고 조립에만 급급하던 한국 산업을 꼬집은 것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도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품소재 강국으로 거듭나자’는 목표를 세워 2001년 부품소재 전문기업 육성 특별조치법을 신설하고 약 2조원을 투입했다.

기업은 정부의 노력에 화답했다. LG화학과 SK는 2차전지 사업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했고 현대모비스는 주력사업을 자동차 부품으로 바꿨다. 그 결과 2002년 29억달러였던 부품소재 흑자 규모가 2006년 300억달러로 10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정부는 부품소재산업 혁신을 위해 수시로 산업계를 만났고 기업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혁신에 동참해 협업이 정말 잘됐다”고 말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산업부 차관, 장관을 지냈다.

“정부·기업 간 협업 실종됐다”

이 전 장관은 15일 니어재단(이사장 정덕구)이 ‘한국의 산업 생태계와 혁신성장’을 주제로 연 시사포럼에서 “과거 한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정부와 산업 간 협업이 오늘날엔 보이지 않는다”며 “이것이 한국의 혁신성장을 제약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정덕구 이사장 역시 비슷한 진단을 내놨다. 그는 “한국 경제가 가계와 산업, 기업부문 모두 위기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데 주된 이유는 정부와 산업계 간 대화가 끊겼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장지상 산업연구원장은 큰 그림의 산업혁신전략 부재가 오늘날 위기에 일조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정부는 시장에 되도록 덜 관여하는 것이 좋지만 최소한 큰 방향의 산업정책은 마련해줘야 한다”며 “중국의 ‘제조 2025’와 같은 전략을 통해 산업 발전 방향의 신호를 주고 혁신을 촉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조적 실물 위기에 처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위기라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장 원장은 “한국 경제는 장기간 서서히 가라앉는 실물 위기를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성장의 원천이던 산업부문이 쇠퇴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미래 투자도 줄고 있다”며 “짧은 시간에 극복했던 과거 위기와 다르다”고 분석했다. 정 이사장 역시 “경제 생태계 전반이 위기 상황”이라며 “오래 축적된 위기 요소들이 광범위하게 결집된 복합 위기”라고 했다.

김동원 고려대 초빙교수는 “2011년부터 올 9월까지 제조업 생산은 겨우 2.2% 증가했고 이마저도 반도체와 전자제품을 제외하면 7.3% 감소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장 가동률은 외환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반도체를 제외한 투자 부진이 심각하다”며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기업가정신 되살려야”

전문가들은 위기를 극복하려면 기업가정신을 되살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이 전 장관은 “한국 산업 발전의 주된 요인은 기업가정신이었고 기업이 뛰어야 혁신이 일어난다”며 “기업의 도전과 모험을 저해하는 경직된 노동시장과 각종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계 스스로가 혁신 생태계를 조성하지 못한 것도 문제라는 의견이 나왔다. 김도훈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국 산업 구조는 완성재 대기업과 부품소재 생산 중소기업으로 구성된 생태계가 고착돼 있어 외부 세계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차국헌 서울대 공과대학장은 “한국 사회는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신용불량자가 된다”며 “이런 사회에서 누가 혁신을 위한 도전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덴마크와 같은 나라처럼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사회 안전망을 잘 구축해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