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인 ‘시중은행의 지역 내 대출 의무화’ 제도 도입을 본격 추진한다. 당초 금융위는 이 제도가 은행 자율성을 침해하는 등 부작용이 크다고 판단해 백지화하기로 내부 방침을 세웠지만 최근 지방 경기침체가 심해지고 있다는 분석에 따라 방침을 바꿨다. 하지만 전국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은행에 지역대출 비중을 강제 할당하는 건 시장 원리에 반할 뿐 아니라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본지 5월23일자 A14면 참조

◆6개월 만에 돌아선 금융위

금융위원회와 금융연구원은 19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금융회사 지역투자 활성화 방안’ 토론회를 공동 주최한다. 시중은행이 지역에서 받은 예금의 일정 비율을 해당 지역 내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에게 의무적으로 대출해주는 내용을 담은 지역재투자제도 도입을 논의하는 자리다. 이번 토론회는 금융위 요청에 따라 이달 초 갑작스럽게 일정이 확정됐다. 금융위 관계자는 “지역재투자제도 도입에 앞서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 토론회를 열게 됐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의 인수위원회 역할을 맡은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지난해 7월 시중은행의 지역대출 의무화를 골자로 하는 지역재투자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현행 상호저축은행법에 따라 저축은행은 전체 대출의 50% 이상(수도권 기준, 비수도권은 40%)을 본점이 속한 권역에 내줘야 한다. 시중은행은 이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서울엔 실물경제 규모에 비해 더 많은 자금이 유입되지만, 지방은 실물경제보다 적은 자금이 공급된다는 것이 국정위의 논리였다.

"은행 자율성 침해한다"며 추진 안한다더니… '시중銀 지역대출 의무화' 다시 꺼내든 금융위
금융위는 지난해 9월 지역재투자제도의 영향 등에 대한 연구용역을 금융연구원에 발주했다. 금융연구원은 올초 제도 도입에 따른 부작용이 더 크다는 내용의 연구용역 최종 결과를 금융위에 제출했다. 금융위도 은행의 자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제도 도입을 백지화하기로 내부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최근 경기침체로 지방 중소·중견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위가 당초 방침을 바꿔 재추진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더욱이 현 정부의 국정과제를 백지화하는 것에 대한 금융위 고위 관계자들의 부담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금도 지역금융회사 있는데…”

지역재투자법은 미국이 1977년 제정한 지역재투자법(CRA)이 모델이다. CRA는 지역에서 영업하는 금융회사들이 해당 지역의 개인 및 중소기업 등에 대해 일정 비율의 대출을 의무화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역재투자제도는 2000년대 중반부터 수차례 도입 논의가 있었지만 부작용이 크다는 판단에 따라 번번이 무산됐다. 최근 10년 새 각종 연구기관이 내놓은 연구보고서에서도 미국 CRA에 따른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시중은행에 상대적으로 수익과 신용이 낮은 대출자를 대상으로 대출비율을 강제하는 건 시장 원리에 위배되고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해칠 수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금융권에서도 시중은행에 지역 금융회사의 부담을 떠넘기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한 은행 임원은 “지금도 저축은행과 상호금융 등 지역금융회사들이 있는 상황에서 전국을 기반으로 하는 시중은행에 지역 단위 규제를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