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8월5일 한 기업인이 사채업무상담 창구에서 국세청 직원과 상담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72년 8월5일 한 기업인이 사채업무상담 창구에서 국세청 직원과 상담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누군가 뒤를 밟은 것 같으니 호텔을 옮깁시다.”

1972년 봄 서울 회현동 뉴남산관광호텔. 김용환 청와대 비서관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호텔 방이 분주해졌다. 다급히 짐을 챙기는 재무부 관리와 한국은행 직원의 손이 떨렸다. 몰래 사표까지 써놓고 준비한 거사(巨事)가 탄로나면 국가경제가 파산 위기에 몰릴 수 있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키자”고 다짐한 이들은 다음 회합 장소를 정한 뒤 흩어졌다. 텅 빈 방엔 ‘경주종합개발계획’이 담긴 위장 플립차트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부슬비가 내리던 그해 8월2일 밤 9시40분. 김종필 국무총리 초청으로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만찬을 하던 국무위원들에게 느닷없이 임시 국무회의 개최 소식이 날아들었다. 영문도 모른 채 청와대로 달려온 장관들은 휴가를 떠났던 박정희 대통령과 책상 위 서류뭉치를 마주하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날 밤 11시40분 일사천리로 국무회의를 통과한 ‘작전명 경주종합개발’은 전파를 타고 전국 안방으로 퍼져나갔다. 열대야에 밤잠을 설치던 가정주부와 상인들은 갑작스러운 뉴스 특보에 놀라 귀를 세웠다. 굵어진 빗줄기가 시끄럽게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법적 조치였던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이른바 ‘8·3 사채(私債) 동결 조치’는 한밤의 소나기처럼 그렇게 전국을 덮쳤다.

◆고도성장의 그림자

“만세! 만세! 만세!”

1972년 8월5일 사채 신고를 독려하는 표어가 걸린 국세청 사채신고 상담소.  /국가기록원 제공
1972년 8월5일 사채 신고를 독려하는 표어가 걸린 국세청 사채신고 상담소. /국가기록원 제공
8월3일 오전. 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 회의실에서 만세삼창이 울려 퍼졌다. 회사를 벼랑 끝으로 몰던 사채라는 악령과의 결별을 자축하는 환호성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날 0시를 기해 모든 기업 사채를 ‘월 이자 1.35%(연 16.2%), 3년 거치 후 5년 분할상환’으로 조정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물가상승률이 연 15% 수준이던 점을 감안하면 무이자 혜택이나 다름없었다. 별도로 2000억원에 달하는 은행대출의 저리 대환 지원과 법인세 경감 계획도 공개했다.

기업 사채는 한국 경제가 전례없는 성장을 구가하던 1960년대 서울 명동을 본거지로 독버섯처럼 퍼져나갔다. 내부 자본이 부족한 기업들이 수출 증대와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차입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당시 제도권 은행 기능이 수출금융과 단기자금을 공급하는 데 치우쳐 영세상인은 물론 대기업까지 연 50% 안팎의 살인적인 금리를 감수해야 했다.

8·3 조치의 성공을 이끈 김용환 재무부 장관(오른쪽 두 번째)이 1977년 1월 재무부 시찰을 나온 박정희 대통령을 영접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8·3 조치의 성공을 이끈 김용환 재무부 장관(오른쪽 두 번째)이 1977년 1월 재무부 시찰을 나온 박정희 대통령을 영접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비싼 자본재를 들여와 경공업 제품을 수출하는 산업 구조가 쌓아올린 외화채무(차관)와 무역 적자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었다. 1971년 ‘수출 강박증’에 걸린 정부가 원화가치를 평가절하한 정책은 달콤했던 ‘저리(低利) 외채’마저 독사과로 바꿔놨다. 그해 8월 닥친 ‘닉슨 쇼크(달러·금 태환의 정지)’는 글로벌 경기까지 쑥대밭으로 만들며 한국 경제를 사면초가로 내몰았다. 1968년 13.2%에 달한 실질 국

총생산(GDP) 증가율은 1971년 10.5%로 떨어졌고, 같은 기간 수출 증가율은 42.2%에서 27.8%로 고꾸라졌다.

경제 전반에 암(癌)처럼 퍼진 사채는 1969년부터 외채를 들여온 대기업들을 무서운 속도로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기업 부실은 보증 은행들의 대불(代拂)과 부실채권 증가로 이어졌다. 위기를 감지한 국제통화기금(IMF)은 1970년 추가 외자 도입 제한을 권고한다. ‘한국 최초의 외환위기’를 향한 도화선이 빠르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자력 회생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김용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당시 경방 명예회장)은 1971년 6월11일 청와대를 찾아 “기업들에 퍼져 있는 사채 규모가 1800억원에 달해 이대로라면 살아날 수 있는 기업이 없다”며 전격적인 조치를 취해달라고 읍소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박 대통령이 훗날 25대 재무부 장관에 오르는 김용환 외자담당 비서관에게 이미 특명을 내린 지 수개월 뒤였다.

◆드러난 지하경제

4만677건에 총 3456억원. 사채 신고 마감일인 8월9일 드러난 지하경제의 실체는 충격적이었다. 당시 협의통화(M1·현금과 요구불예금)의 80%에 달하는 규모로 전경련 예상치의 두 배에 가까웠다. 오너나 과점주주가 자기 기업에 돈을 꿔준 ‘위장사채’도 3분의 1에 달했다. 부도덕한 이자놀이에 격노한 박 대통령은 위장사채의 출자전환과 해당 기업에 대한 지원 배제를 지시했다.

대기업 부도사태는 8·3 조치를 전환점으로 진정 국면에 들어갔다. 빚 부담을 덜어낸 기업들은 다시 투자를 늘리기 시작했다. 1972년 7.2%로 바닥을 찍은 GDP 증가율은 이듬해 사상 최고인 14.8%로 올랐다. 글로벌 수요 회복까지 겹치면서 수출은 1973년 98.6% 증가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다.

사금융이 지배하던 금융시장도 일대 전기를 맞는다. 8·3 조치에 발맞춰 시행한 단기금융업법,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 등 이른바 ‘사금융 양성화 3법’은 오늘날 제2금융권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태국 등 동남아시아의 단기금융회사를 본뜬 단자회사가 탄생해 어음의 발행과 유통시장을 열었고, 무진(無盡)업체로 불리며 ‘일수(日收)’를 찍던 전주(錢主)들은 상호신용금고(지금의 상호저축은행)로 변신했다. 유대 관계로 맺어진 계(契) 모임은 비영리조직인 신용협동조합으로 뭉쳤다.

이후의 경제 안정은 현대 한국 경제의 뼈대인 중화학공업 육성(산업합리화 정책)을 본격화하는 주춧돌 역할을 했다. 당시 기업 재무구조 개선은 1973년에 닥친 1차 ‘오일쇼크(유가폭등)’를 버텨내는 체력을 제공했다. 후속 금리인하 정책도 부동자금의 자본시장 유입에 물꼬를 터 기업의 주식과 채권 발행을 촉진했다.

8·3 조치 두 달 뒤 박정희 정부는 제4공화국(유신체제) 출범을 선언했다. 정권을 위태롭게 하던 경제 위기는 이미 새 체제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변신해 있었다.

◆지울 수 없는 오점

“재벌에 면죄부를 주고 금융위기를 키운 오판이었다.”

8·3 조치는 국민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해 대기업에 특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사채시장 참여자 중에는 자녀 교육비와 주택 마련을 위해 쌈짓돈을 돌리던 가정주부와 상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체 건수의 90%가 300만원 이하 소액사채였고, 금액으로는 32%를 차지했다. 영세 채권자 보호 명목으로 300만원 미만 소액사채의 경우 상환기간을 줄이거나 조정 대상에서 제외했지만 수많은 가계가 파산으로 내몰렸다.

장기적으로는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을 뿌리내리는 부작용을 남겼다. 정부 지원 가능성에 기댄 ‘대마불사’

신화와 도덕적 해이는 이후 차입에 기초한 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퇴출당해야 마땅한 기업들의 과잉 투자는 재무안정성 관리에 충실했던 우량 기업들을 경쟁에서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위기 대응 능력을 상실한 경영 방식과 금융시스템이 25년 뒤 IMF 외환위기로 이어졌다는 진단도 있다. 글로벌 경기 회복이 없었더라면 성공하기 어려운 정책이었다는 사후해석도 잇따랐다.

◆풀지 못한 숙제

서울 명동의 사채시장은 8·3 조치로 한때 존폐 기로에 섰지만 이후에도 감시를 피해 명맥을 유지했다. 사금융 폐해를 막기 위해 1982년 금융실명제 도입,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김영삼 대통령 긴급명령) 등 조치가 이어졌지만 1990년대까지도 중소기업의 사채 의존도는 전체 차입의 10%를 넘나들었다. 규모별, 용처별 다양한 자금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이 부족하다는 방증이었다.

외환위기 이후엔 생활고에 빠진 가계와 영세 자영업자를 겨냥한 사금융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불법추심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정부가 소규모 가계대출업자들을 양성화하기 위해 2002년 대부업 제도를 도입했지만 여전히 이자제한법(현행 연 24.0%)을 어긴 미등록 업자들의 고리대금업 피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등록 대부업자는 2017년 말 기준 8084곳, 이용자 수는 약 250만 명에 달한다.

중소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한 자본시장 활성화도 미완의 금융개혁 과제로 남아 있다. 국내 공모 회사채시장은 신용평가사가 등장하고 채권시가평가제도가 자리를 잡은 2000년 전후에 기틀을 갖췄지만 여전히 중소기업 참여 비중이 2%에도 못 미치고 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