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기자의 알쓸커잡] 1954년산 원두 쓴 커피, 마셔도 되나요?
“1993년산 브라질로 하시겠습니까?”

도쿄 긴자의 오래된 가게 ‘카페 드 람브르’. 몇 년 전 그곳을 처음 갔을 때 받았던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단지 100세의 할아버지 바리스타 세키구치 이치로가 커피를 내리는 광경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와인도 아닌 커피에 빈티지라니.

‘갓 볶은 신선한 원두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라고만 생각했던 그때. 그곳의 메뉴판은 신세계였습니다. 1954년산 콜롬비아, 1982년산 키부, 1976년산 멕시코 등 끝없이 이어지는 빈티지가 믿어지지 않았지요. 순간 생각했습니다. 이걸 과연 먹어도 되는 건지, 먹으면 혹시 죽지는 않을는지, 맛은 있을지, 일본에서 구급차를 부르려면 119를 눌러야 하는 건지 등등…. 곳곳에서 커피를 홀짝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용기를 내 도전해 봤습니다. 그리고 도쿄에 갈 때마다 꼭 그곳에 들르게 됐지요. 사실 그곳에 가기 위해 도쿄행 표를 살 때도 있었답니다.

카페 드 람브르는 커피 원두를 숙성시키는 ‘에이징 커피’를 내놓습니다. 1948년부터 70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바리스타 세키구치가 정성들여 보관해놓고 장기간 숙성시킨 생두로 만들지요. 보통 로스팅한 원두는 2~3일, 또는 1주일 정도 지나면 윤기가 흐르며 향도 맛도 좋아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에이징 커피는 이런 보통의 숙성과는 다릅니다. 별도의 보관 시설에서 온도와 습도까지 관리해가며 보관하는 생두입니다.

‘묵은 콩’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숙성 콩’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묵은 콩은 가공과 등급분류까지 다 마친 생두가 팔려나가지 못한 채 창고에 쌓여있는 것이지만, 숙성 콩은 일정 기간을 온도 20~25도에 맞춰 보관해야 합니다. 습도도 예민하게 관리해야 하지요. 이렇게 숙성하면 신맛은 줄어들고 묵직한 보디감은 올라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카페 드 람브르에서는 그런 규칙이 깨집니다. 어떤 커피에서는 풀냄새가 가득하고, 어떤 커피에서는 갓 볶은 콩 못지않은 산미가 가득하고요. 쓴맛과 구수함, 적당한 단맛까지 편안한 맛을 주는 커피도 있습니다. 에이징 커피를 더 맛있게 만드는 건 세월입니다. 내일 일어날 일도 잘 모르고 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50년의 세월을 지닌 커피 한잔이 위안일 때가 있지요.

그 카페의 철학은 이렇습니다. “올드커피(에이징 커피)는 실제로 숙성을 해보고, 세월을 거듭한 사람밖에 모르는 영역이다.” 세키구치 할아버지가 지난달 10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그의 손자가 카페 드 람브르를, 할아버지가 정성껏 돌봐온 생두를 지키고 있다는군요.

국내에서는 아직 전문적으로 에이징 커피를 다루는 곳은 없지만, 태국 도이창커피의 에이징 커피 원두가 수입되고 있습니다.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