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정수기 팔던 초심으로 돌아간 윤석금 회장
국내에서 렌털(대여) 서비스를 처음 시작한 ‘방문판매의 신화’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이 돌아온다. 내년 초 침대 매트리스 대여 서비스를 시작으로 렌털 사업에 다시 뛰어든다. 웅진그룹은 내년을 ‘그룹 재건의 해’로 삼아 공격적인 경영에 나서겠다고 선포했다. 한때 재계 순위 32위까지 올랐다가 한순간에 추락한 웅진이 재기의 신호탄으로 렌털 사업을 선택한 것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이자 그룹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윤 회장은 27일 “초심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라 떨린다”고 했다.

렌털시장 ‘거인의 귀환’

윤 회장이 복귀작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고른 건 철저하게 계산된 전략이다. 그는 “매트리스는 성인 여러 명이 들기에도 무거워서 제대로 관리하기 어렵다”며 “우리 제품은 스프링 대신 다양한 재질로 제조해 세균이 들어갈 틈이 없고 가볍다”고 말했다.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옵션이 있고 세우거나 반쯤 눕히는 등 각도 조절도 가능한 스마트 제품이다. 고가이지만 렌털 방식으로 소비자 부담을 줄였다.

제품은 국내 한 중소기업에서 공급받는다. 윤 회장은 “앞으로 기술력이 뛰어난 중소기업이 판로를 개척하는 데 도움을 줄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그 후엔 고급 비데를 선보인다. 국내 최초로 물줄기가 변화하며 부드럽게 씻어낸다. 그는 “해외 전시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대부분의 비데가 기능이 비슷한 제품이라 우리 신제품은 눈에 띌 것”이라고 했다. 이어 정수기, 공기청정기 등 10여 가지 혁신적인 생활가전제품을 잇따라 내놓을 계획이다.

윤 회장은 “렌털 서비스와 방문판매는 그룹의 시초이자 우리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라며 “웅진의 노하우와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했다. 렌털 품목이 다양해지고 렌털 시장이 급성장하는 요즘 분위기도 윤 회장은 기회라고 했다. 이제는 후발주자가 됐지만 렌털의 ‘원조’ 회사답게 차별화된 제품과 전문적인 서비스로 시장에 안착하겠다는 계산이다. KT경제경영연구소는 국내 렌털 시장이 올해 28조7000억원에서 2020년 40조원 규모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복귀 시점을 내년 초로 잡은 것은 이 무렵 ‘족쇄’가 풀리기 때문이다. 웅진이 핵심 계열사였던 코웨이를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에 매각(2013년 1월)했을 당시 ‘정수기와 비데 등 코웨이의 기존 사업에 5년간 진출해선 안 된다’는 겸업금지 조항에 묶였다. 이 조항은 내년 1월에 끝난다.

국내 생활가전업계는 ‘거인의 귀환’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인력 엑소더스 등도 예상된다. 한 후발 업체 관계자는 “많은 사람이 코웨이를 여전히 웅진코웨이로 인식할 만큼 웅진의 존재감이 크다”며 “대부분 렌털회사의 방문판매조직 책임자가 웅진 출신일 정도로 웅진은 렌털 사관학교”라고 말했다.

그룹 내 분위기는 ‘다시 한번 해보자’며 고무돼 있다. 웅진씽크빅의 ‘북클럽’ 서비스가 시장에 안착하고, 웅진에너지의 실적이 좋아지는 등 주요 계열사들도 재건 작업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2015년 설립한 터키 법인에서 웅진식 렌털 시스템이 자리잡으면서 해외사업도 탄력을 받고 있다.

다시 쓰는 샐러리맨 신화

충남 공주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윤 회장은 1971년 한국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외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영업사원 1년 만에 54개국 영업사원 중 1등을 했다. 미련 없이 샐러리맨 생활을 청산하고 1980년 헤임인터내셔널을 세웠다. 전두환 정부 시절 과외를 금지하자 학원강사의 강의를 녹음해 팔았다. 자본금 7000만원짜리 이 회사가 그룹의 모태가 된 웅진출판이다.

국민소득이 높아지자 윤 회장은 물 시장에 주목했다. 하지만 고가 정수기는 안 팔렸다. 1998년 외환위기 때 창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정수기를 본 윤 회장은 이러다 회사가 부도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고민 끝에 ‘차라리 나눠주자’는 생각을 했다. ‘코디’로 불리는 주부사원들을 고용해 월 3만원을 받고 정수기를 빌려줬다. 국내 가전제품 렌털 서비스의 시작이다. 1998년 894억원이던 매출은 5년 만에 8350억원으로 늘었다.

식음료(웅진식품)와 화장품(코리아나화장품), 저축은행(서울저축은행), 건설(극동건설), 태양광(웅진폴리실리콘)까지 사업 범위를 넓혔다. 2011년 매출 6조1500억원의 재계 32위 그룹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건설 경기가 나빠진 2012년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이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재무구조가 악화됐다. 웅진코웨이(현 코웨이)·웅진식품·웅진케미칼(현 도레이케미칼) 등 핵심 계열사를 팔며 혹독한 구조조정을 했고 2014년 14개월 만에 법정관리를 조기 졸업했다.

웅진이 일어선 비결은 가장 잘할 수 있는 데 집중했다는 것이다. 벼랑 끝에 섰던 윤 회장은 처음 사업을 시작한 출판으로 눈을 돌려 북클럽을 선보였다. 독서와 출판을 융합하고 웅진그룹의 특기인 렌털 개념을 도입한 게 먹혔다. 최근 회원 수 37만 명을 돌파했다.

윤 회장은 요즘 자서전을 쓰고 있다. 그룹 창업부터 법정관리, 재기에 이르는 내용을 담았고, 올해 출간할 예정이다. 윤 회장은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큰 성공도 하고 큰 실패도 했고, 또 그 과정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며 “내가 겪은 흔치 않은 경험이 우리 사회 청년들이나 젊은 사업가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