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막히는 '쓰리고 시대'…기업인은 답답하다
지난 27일 경기 안성시 LS미래원 대강당. 그룹연수원인 이곳에 갑자기 구자균 LS산전 회장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LS산전 팀장들을 대상으로 한 ‘리더십 향상 워크숍’이 거의 끝나갈 무렵. 놀란 표정의 팀장들 앞에서 구 회장은 ‘위기’를 얘기했다. 그리고 해법으로 ‘기업문화 혁신’을 꼽았다. 조직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만으론 위기를 극복하기 힘들다는 말을 반복했다. 구 회장이 팀장 워크숍에 참석한 것은 2011년 이후 6년 만이다. 모처럼 등장한 회장의 당부는 끈질겼다. 연수원 식당으로 회합은 이어졌고, 폭탄주까지 돌았다. 술 한 잔마다 격려와 당부가 소주와 맥주처럼 따라붙었다.

기업 오너들의 위기의식이 임계점을 넘고 있다. 위기의 근원은 ‘변화’다. 정확하게는 그 ‘속도’에 대한 두려움이다. 세상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었다. 호사가들의 말장난이 아니다. 오너들은 산업과 시장의 광폭 질주에 몸서리를 친다. 4차 산업혁명의 상징으로는 ‘알파고’ ‘포켓몬고’ ‘아마존고’ 세 가지가 꼽힌다. 일명 ‘쓰리고’다. 천재 바둑기사가 인공지능(AI)에 맥없이 무너지고(알파고), 실체도 없는 괴물을 찾느라 관광지 순위가 바뀌고(증강현실 게임 포켓몬고), 주인 없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파는(아마존고) 세상이다. 놀랄 새도 없이 어느새 일상이 됐다. 판타지 영화처럼 현실감이 없을 정도다.

그룹을 이끄는 오너들은 참모들과 지인을 만날 때마다 답답함을 토로한다. 이대로 눌러앉아 있다간 미래가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당장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가끔 외부로 발표되는 그들의 생각엔 위기감이 잔뜩 묻어있다. 공개되는 의견인 만큼 최대한 정제된 언어로 쌓아올린 내용이지만, 짙은 두려움을 읽어내긴 어렵지 않다.

28일 서울 여의도 LG그룹 트윈타워에서 열린 ‘LG글로벌 챌린저’ 발대식에 참석한 구본준 LG 부회장의 격려사도 여기에 속한다. 그는 참석한 대학생들에게 “기술이 발전하고 융합되면서 여러분이 앞으로 살아갈 환경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며 “과거의 익숙한 것들을 답습하기보다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보고, 이전과 다른 방식을 찾아 도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대학생보다는 그룹 임직원에게,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처럼 들렸다.

“상상을 뛰어넘는 혁신으로 신사업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변화 속도가 빠를 때는 업의 본질을 꿰뚫고 근원적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허창수 GS그룹 회장), “일본 대형마트의 매출은 단 15년 만에 반 토막이 났다. 기업가정신으로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등의 말은 모두 같은 문맥으로 읽힌다.

변화의 바람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업종일수록 위기의식은 더 팽배하다. 자동차업종이 대표적이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최근 사석에서 임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율주행차, 커넥티드카에 이어 도요타는 심지어 나는 차까지 만든다고 한다. 이런 마당에 당장 실적 악화로 연구개발(R&D) 투자 여력은 줄어들고, 전기차에선 테슬라 같은 새로운 경쟁자까지 등장했다. ‘패스트 팔로어’ 자리마저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런 변화를 ‘딥체인지(deep change·근본적 변화)’라는 말로 압축한다. 공석이든 사석이든 이 말을 달고 산다. 그마저 올 들어서는 ‘딥체인지 2.0’으로 한 단계 더 진화했다. 단어 하나로는 도저히 담아내기 어려울 만큼 변화 속도가 빠르다.

한국만의 특수성도 오너들의 한숨을 깊게 하는 요인이다. 예상하지 못한 ‘조기 대선’에 연이어 나오는 ‘재벌개혁’ 구호와 기업 규제 정책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등 메가톤급 폭발력을 지닌 정책들은 파장을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관련 부서에서 영향과 파장을 분석한 보고서가 줄줄이 올라오지만, 정작 해결책은 빠져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주의, 중국의 견제 등 다른 악재도 즐비하다.

대기업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도 바뀌고 있다. 방향은 대체로 부정적인 쪽이다. 시민단체 직역단체 등의 요구는 거칠다. 노동계는 아예 문재인 정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럼에도 그룹 임직원이 자신들만큼 고민하지 않는 점도 불편하게 다가온다. 지금 괜찮다고 앞으로도 ‘봄날’이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자신은 다가올 위기를 가리키는데,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안색만 살피는 임원들을 보면 화가 날 때도 많다. 재계 10위권 그룹의 한 오너는 “그룹 핵심을 빼고 나면 변화에 대한 경각심이 낮은 게 사실”이라며 “최상급 관리자 중에도 ‘까라면 깐다’ 정도의 옛날 방식만 고수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조직 전반의 창의성을 높이기 위해 근무시간과 호칭을 바꾸는 등 소통 방식에 변화를 줬지만 아직 여의치 않다. 한 기업 관계자는 “임원 회의 등에서 오너가 편하게 의견을 내보라고 해도 여전히 ‘반대 의견’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기업문화 혁신이 말처럼 쉽겠느냐”고 전했다. 그래서 요즘 오너들의 일상적 사이클은 긴장과 경각심, 섭섭함과 체념의 반복이기도 하다. 뭘 좀 바꿔보려는 절박한 시도와 착상이 기업 내 만연해 있는 안일한 매너리즘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오너의 숙명이다.

안재석/좌동욱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