퀄컴, 법률대리인으로 전직 공정위 국장 내세웠지만 참패

"마치 잘 구성된 소설을 듣는 기분입니다."

지난 7월 20일 정부세종청사 공정거래위원회 심판정.
퀄컴이 타사의 특허를 착취하는 등 시장지배적 지위를 남용했다는 내용의 심사보고서가 발표되자마자 퀄컴의 법률대리인 임영철 변호사가 처음 던진 한마디였다.

퀄컴 측 법률 대리를 총괄한 임 변호사는 서울고법 판사 출신으로 정책국장, 하도급국장 등 공정위 요직을 거친 인물이다.

특히 1997년부터 2년간 공정위의 심의 의결 보좌를 담당하는 심판관리관(국장급)으로 재직한 경력이 있어 공정위의 의사결정 구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변호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퀄컴 측이 임 변호사를 총괄 대리인으로 기용한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업계의 관측이다.

임 변호사는 "소설은 논리적 인과관계가 필요 없고 개연성만 있지만, 제재를 위해서는 논리와 증거가 필요하다"라며 공정위의 조사 결과를 공개적으로 평가 절하했다.

그러면서 "시장에 이상징후가 포착된 것도 아닌데 이 조사가 어떤 계기로 시작됐는지 의문"이라며 "중국이 특허권 로열티를 낮추도록 강제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휴대전화 제조사들이 로열티 인하를 원하는 상황에서 이번 조사가 시작됐다"라고 주장했다.

공정위 조사가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시작된 것일 수 있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퀄컴 측은 퀄컴이 타사의 특허권을 수집하면서 타사에 퀄컴의 특허를 제공하지 않은 것은 상대방의 특허권 가치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퀄컴이 특허권을 일방적으로 수집한 탓에 경쟁사 칩세트를 사용하는 휴대전화제조사들이 특허 소송 위험에 노출됐다는 심사관 의견에 대해서는 자신들은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 위원들은 "만약 퀄컴이 소송 공격을 하면 상대방이 소송을 막을 권리가 있나"라고 응수했다.

퀄컴 측은 칩세트제조사들과 표준필수특허(SEP) 제공 협상에 성실히 임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해관계인으로 전원회의에 참석한 다른 업체 관계자들은 "기본적인 자료조차 제공받지 못했다"며 정반대 증언을 했다.

퀄컴 측과 이해관계인 간 공방은 공정위 위원들이 "양측이 각자 정반대의 주장만 하고 있다.

위원이 알아서 판단하겠다"라고 정리를 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공정위 심사관으로 나선 채규하 시장감시국장은 2년간 조사를 통해 확보한 관련 소송기록과 이해관계사 직원의 증언 등을 퀄컴의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로 제시하며 퀄컴 측 변호인을 압박했다.

결국 첫 회의에서 채 국장이 퀄컴 측의 반박에 대해 다시 조목조목 반대 근거를 나열하자 퀄컴 측은 "오늘 새로운 내용이 많이 나와서 시간이 필요하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다음 전원회의 일정을 잡아달라"고 말하고는 심판정을 떠났다.

이후에도 전원회의는 4차례나 더 열렸고 그때마다 공정위 심사관과 퀄컴 측의 치열한 반박과 재반박이 반복됐다.

퀄컴 측이 자진시정을 조건으로 제재 없이 사건을 종결하는 동의의결을 신청하면서 전원회의는 두 차례 더 열려 총 7차례 개최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심의 기간이 길었던 것은 그만큼 쟁점이 복잡했고 확인해야 할 사항도 많았기 때문이다.

공정위 심사관이 전원회의에 상정한 심사보고서 본문만 400페이지에 달했고 첨부자료까지 포함하면 3천200페이지가 넘었다.

법학·경제학·특허법·특허기술 등 쟁점 분야별로 심리가 진행되면서 국내외 유수한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심사관과 퀄컴 측을 각각 대변하며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삼성·LG(한국), 애플·인텔·엔비디아·미디어텍(미국), 미디어텍(대만), 화웨이(중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이해관계인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점도 눈길을 끌었다.

공정위 전원회의는 28일 공정위 심사관의 손을 들어줬고 2년 넘게 진행된 퀄컴 사건은 역대 최대 과징금 기록을 세웠다.

결국 퀄컴 측이 '잘 구성된 소설'이라고 비아냥댔던 심사관의 심사보고서는 현실을 그대로 적시한 끔찍한 '다큐멘터리'로 일단락된 셈이다.

퀄컴 측이 공정위 처분에 반발, 항소 방침을 밝히면서 공정위와 퀄컴 간 전쟁은 법원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세종연합뉴스) 민경락 기자 roc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