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탄생 100년] '누가 더 국가경제에 기여하는가' 놓고 정부와도 맞서
많은 이들이 아산 정주영을 박정희의 ‘발전국가’에 가장 우호적이고 협력적이었던 기업인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현대는 다른 재벌들에 비해 후발주자로 시작해 중화학공업화 정책과 함께 1970년대 후반 10대 재벌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아산은 다른 정치 지도자에 대해서는 인색한 평가를 많이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유독 높이 평가하는 언급을 여러 번 했다. 이를 두고 발전국가와 현대의 관계를 비판하는 쪽에서는 정경유착의 전형적 사례로 지목하기도 한다.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아산(오른쪽 두 번째)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당시 현대중공업 부사장·맨 왼쪽)이 올림픽 유치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경DB
19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아산(오른쪽 두 번째)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당시 현대중공업 부사장·맨 왼쪽)이 올림픽 유치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경DB
그러나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를 떠나 정주영은 국가와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긴장을 유지하며 기업활동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양강 댐 건설사업이다. 아산은 당초 일본공영이 설계한 콘크리트댐을 사력(沙礫)댐으로 변경했다. 이로 인해 일본공영과는 물론 건설부, 한국수자원개발공사 등 정부기구와 마찰을 빚었다. 그의 저항은 단순히 일개 건설업자의 설계변경이 아니었다. 일본공영은 물론 한국 관료들조차 무시했던 국내 기업의 기술력으로 더 효율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경제적 민족주의’의 발로였다.

서구의 후발산업화를 연구한 학자 알렉산더 거센크론은 후발주자가 선발주자와 경쟁하고자 하는 의욕과 필요성이 성공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경쟁의 의욕과 필요성은 어디서 오는가? 후발주자인 정주영에게 바로 이 의욕은 ‘경제적 민족주의’에서 시작됐다. 이것이 그가 개별 이익만을 좇는 보통의 기업인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누가 더 국가경제에 기여하는가, 무엇이 더 국익을 위한 것인가, 오직 이 하나의 기준을 두고 정주영은 국내 기업은 물론 해외 기업, 때로는 국가와도 경쟁을 감수했다.

조선업 진출도 국가를 위한 결정이었다. 조선업은 박정희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정주영도 조선업에 관심은 있었으나 당시 한국 경제의 여건이나 현대의 형편상 시기상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정희의 신념과 강요에 설복당해 결국 기업 이윤을 포기하고 국가기반시설 확충이라는 목표를 위해 조선업을 시작했다.

이런 사례들은 기업이 발전국가에 기생했던 존재, 나아가서 발전국가가 지시한 정책을 단순히 실행한 종이호랑이라고 보는 입장과 역사적 현실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아산에게 기업 경영은 곧 나라 경영이었으며, 기업인은 나라살림을 위탁받은 청지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기업경영이 곧 국가 발전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기업보국의 신념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단기적 이타주의와 장기적 개별 이익의 조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당장 자신의 이익 포기가 장기적 관점에서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에 더 큰 이익으로 되돌아온다는 ‘일반화된 호혜성’을 보여주는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