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오전 10시 베트남 호찌민 중심가 응훼 거리에 있는 사이공 증권사 객장.20여평 남짓한 공간이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복잡하다. 100여명의 고객은 거래 전표를 손에 쥔 채 시세판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객장 한쪽은 새로 계좌를 개설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마치 서울 여의도에 있는 증권사 객장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김승환 한국투자신탁운용 호찌민 사무소장은 "베트남 증권 시장은 거래소 운영시스템과 동시호가,매매 방식은 물론 심지어 금융감독기구도 한국과 비슷하다"며 "현지에 진출한 한국 증권사들은 안방처럼 익숙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한류를 넘는 새 바람

급성장하고 있는 베트남에 '메이드 인 코리아' 경제시스템이 곳곳으로 스며들면서 한국의 국가브랜드 이미지가 높아지고 있다. 영화 대중가요 TV드라마 등의 수출이 불러온 문화한류를 능가하는 '경제한류'가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가장 짧은 기간에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의 경제개발 정책을 적극 지원해왔다. 한국거래소(KRX)가 중심이 돼 베트남 증시 개설을 도와준 게 대표적이다.

1996년부터 4년간 KRX는 베트남 증시 설립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국내 전문가를 파견하고 베트남 정부 관계자들을 국내에서 연수시켰다. 연수용 기자재는 물론 모의증시 운영,전산프로그램 개발 등을 도와주며 현지에 맞는 시스템 모델도 제시했다. 베트남에 '제2의 한국 증시 시스템'을 통째로 만들어준 셈이다. 홍영표 한국수출입은행 호찌민 법인장은 "금융 인프라 지원은 일반 상품 수출과 달리 당장 수익으로 연결되지는 않더라도 두고두고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게 특징"이라며 "국내 기업들이 현지에 진출해 적응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실제 KRX가 10년 이상 베트남에 뿌린 씨는 최근 들어 결실을 맺고 있다. 베트남 증시가 세워진 뒤 한국투자,브릿지,동양종금,미래에셋 등 8개 증권사가 현지에 진출해 해외 유수의 증권사,투자은행(IB)들과 대등한 경쟁을 벌일 수 있게 됐다. 신평호 KRX 해외사업추진단 부장은 "한국 시스템 구축으로 향후 시스템 유지 · 보수를 위한 후속 사업에도 한국 기업들이 쉽게 진출할 수 있는 등 부수 효과가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일찌감치 베트남을 '경제한류'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발전 잠재력과 자원 등의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대해 호의적인 데다 문화도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경제발전 경험을 전수

정부는 '경제 발전 경험 공유사업(KSP · Knowledge Sharing Program)'을 통해 베트남 경제정책에 대한 컨설팅과 후속 관리를 했다. KSP는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경제 발전 계획에 대한 자문,전문가 파견,베트남 정책 담당자의 한국 내 연수 등 다면적 컨설팅을 통해 베트남의 경제정책 수립에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한국의 수출입은행과 비슷한 베트남 개발은행(VDB) 설립도 우리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베트남 재무부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위해 수출신용기구(ECA)를 설립키로 하고 2005년 기획재정부와 수출입은행에 지원을 부탁했다. 수출입은행은 곧바로 VDB 설립과 운영 전반에 대한 컨설팅에 들어갔다. VDB 실무자를 대상으로 수출금융,프로젝트 파이낸스(PF),리스크 관리 등 은행 업무에 대해 1 대 1 맞춤 컨설팅을 제공했다. 특히 베트남의 가장 큰 관심 사항이었던 △WTO 체제 하에서 수출 보조금 시비를 피하는 법 △정부와 수출입은행의 관계 △PF 금융 지원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금융 계약 등에 대해 '족집게 과외'를 해줬다. 직접 하노이를 방문해 VDB 본점에서 경영 및 여신 정책에 대한 교육도 진행했다.

응웬 꽝 중 VDB 행장은 "한국 정부와 수출입은행 덕분에 오늘의 VDB가 있을 수 있었다"며 "수출입은행은 경제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협력 파트너이며 앞으로도 한국의 경제 발전 경험과 수은의 노하우를 더 많이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이영섭 수출입은행 하노이 사무소장은 "수은은 단 한푼의 수수료도 받지 않았지만 향후 양국 간 경제 협력 확대와 한국의 국가브랜드 이미지 제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베트남을 시작으로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과도 노하우를 공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영기업 개혁도 지원

한국은 외환위기 극복 경험까지 전수해줬다. 자산관리공사(캠코)를 통해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축적한 부실채권 정리 노하우를 이전한 것이다. 캠코는 베트남의 국유기업 개혁을 지원하기 위해 부실채권정리회사(DATC)와 국유기업관리회사(SFIC)의 설립 자문을 맡아 부실채권 정리 및 조직 설계를 위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DATC 산하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실채권의 가치 평가와 처리 방법,DATC 운영을 위한 조직 발전 전략 등 부실채권 처리 전 분야에 대한 체계적인 노하우를 알려줬다. 팜 판 꽝 DATC 회장은 "캠코는 부실채권 처리 분야에서 세계 최고라고 생각한다"며 "40년의 경험을 가진 캠코를 앞으로도 더 많이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서의 경제한류 사업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정책자문관을 직접 파견,종합 컨설팅해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호찌민 · 하노이(베트남) 글 · 사진=강동균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