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경영권 방어수단의 하나인 '포이즌 필(Poison Pill)'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정부가 지난 2일 '투자 활성화대책'에서 포이즌 필을 도입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힌 뒤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경제계는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방어할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환영하는 분위기인 반면 일부 시민단체는 정상적인 M&A 시도까지 가로막는다며 반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법무부는 포이즌 필을 도입하되 '주주총회 특별결의'라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도록 하는 방안을 내놨다. 그러나 이 방안대로라면 대기업을 비롯한 상당수 기업은 포이즌 필을 도입하기가 힘들어져 기업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

◆10년 논란 끝에 도입되나

포이즌 필은 미국과 일본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에서 도입하고 있는 경영권 방어수단이다. 국내에선 상법상 '주주평등의 원칙'(1주당 1표의 의결권 부여)에 따라 허용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계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경영권 보호를 위해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꾸준히 제기됐다.

경제계는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기업에 대한 M&A 시도가 빈번해지고 있지만 정작 방어수단은 자사주 매입밖에 없다는 점에서 도입이 시급하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정부는 외환위기 직후 외국자본을 국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M&A 방어제도를 없앴다. 상장사 주식을 25% 이상 취득할 경우 반드시 40%+1주를 공개 매수해야 한다는 '의무공개매수'제도,외국인의 주식취득한도 제한 규정 등을 잇따라 폐지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1997년 이후 외국자본의 국내기업에 대한 M&A 시도가 급격히 늘었지만 제도만 놓고 보면 국내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은 무방비 상태로 방치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경영권 방어수단이 없다 보니 기업들이 설비투자에 나설 돈을 자사주 매입 등에만 쓰는 문제점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실제 국내 전체 상장법인의 설비투자 규모는 2005년 36조2400억원에서 2007년 34조3000억원으로 줄어든 반면 같은 기간 사내유보금은 285조9000억원에서 355조6600억원으로 급증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100%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들의 상당수가 경영권 방어를 위해 막대한 사내유보금을 쌓아두고 있다"며 "이를 투자로 이끌기 위해 경영권 방어수단을 마련해주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일부 시민단체는 포이즌 필을 도입할 경우 기업 대주주의 경영권 방어에만 이득이 되는 제도라고 지적하고 있다. 적대적 M&A를 노리는 세력도 일부 있지만 외부에서의 M&A 시도가 비효율적인 기업의 경영구조를 바꾸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데,포이즌 필을 도입함으로써 이 같은 순기능을 원천 봉쇄한다는 주장이다.

◆정부,"주총 특별결의 거쳐야 도입 가능"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정부는 일단 경제계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법무부는 올해 안에 포이즌 필 도입 논의를 마무리하고 이르면 내년께 상법 개정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현재 법무부는 미국 및 일본식 포이즌 필(이사회 의결만으로 도입 허용)과 달리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안을 유력하게 검토 중이다. 이사회 결의가 아닌 '주주총회 특별결의'를 거쳐야만 포이즌 필을 도입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주총에 출석한 주주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고,찬성한 주주의 보유 주식이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 1 이상이어야 하는 정관변경을 통해서만 도입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법무부 관계자는 "기존 대주주가 포이즌 필을 통해 적대적이지 않은 M&A까지 무조건 거부할 우려가 일부에서 제기된다"며 "국내 상황에 맞게 제도적 보완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처럼 포이즌 필 도입을 제한할 경우 국내 기업의 상당수는 이 제도를 도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대주주 보유 지분이 적은 대기업 등은 이 같은 방안이 확정될 경우 포이즌 필을 도입하기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삼성전자의 경우 외국인 보유지분은 46%에 달하지만 특수관계인을 포함한 대주주 지분은 15.26%에 불과하다. 현대자동차도 외국인 지분은 30%인 반면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지분은 20.09%일 뿐이다. 외부에서 적대적 M&A 시도가 있다고 가정할 때 두 회사가 주총을 열어 포이즌 필 도입에 필요한 찬성표를 얻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한 기업 관계자는 "정부가 투자 활성화 차원에서 포이즌 필을 도입해준다고 했으면 실효성 있는 방안을 내놔야지 제한적으로 도입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선진국들처럼 이사회 결의로 포이즌 필을 도입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태명/임도원 기자 chihiro@hankyung.com

포이즌 필(Poison Pill)이란

A기업이 B기업을 인수하려 할 경우 B기업이 신주를 발행해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낮은 가격 또는 무상으로 살 수 있는 권리(콜옵션)를 줄 수 있도록 규정한 제도다. 예컨대 B기업의 총 발행주식 수가 100주이고 대주주 지분율이 30%(30주)인 상황에서 A기업이 B기업의 지분 29%(29주)를 확보해 경영권 인수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B기업 대주주가 포이즌 필을 통해 신주 20주를 발행하고 대주주에게 싼 가격에 전량을 매입할 수 있도록 한다면 B기업 대주주는 전체 발행주식 120주 중 50주를 확보하게 돼 지분율이 41.7%로 높아지는 반면 A기업의 지분율은 24.17%로 떨어진다. A기업으로선 B기업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 2주만 추가로 매입하면 되지만 포이즌 필이 도입되면 22주를 더 확보해야 한다.

B기업을 인수하는 데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탓에 인수합병(M&A)이 어렵게 된다. 포이즌 필은 M&A를 시도하는 쪽보다 '먹잇감'이 되는 쪽에 훨씬 유리한 특성이 있어 '독약처방'이라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