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성형외과 의사 A씨는 최근 은행 두 곳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A씨가 이용 중인 연 7% 초반 금리의 전문직 신용대출을 중소기업대출로 전환하면 금리를 연 6% 후반까지 우대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A씨는 "사업자등록증,세금신고서 등만 갖고 오면 개인대출을 사업자대출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은행원이 얘기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은행들에 중기대출을 늘리라고 독려하고 있지만 정작 은행들은 자금 사정이 급박한 중소 제조업체에 돈 빌려주기를 꺼리고 있다. 대신 의사 변호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들의 개인대출을 사업자대출로 전환하거나 대기업이 출자한 특수목적법인(SPC)을 중소기업으로 재분류하는 방법 등을 통해 중기대출을 늘리고 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중기대출이 증가하지 않고 있는데도 수치상으로는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가 생기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융감독당국 등에서 중기대출을 늘리라는 압박이 들어오고 있지만 일선 지점에서는 부실위험 관리 차원에서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에 대출하기가 힘들다"면서 "닥터론(의사 개인신용대출)을 중기대출로 돌려 할당받은 실적을 채우고 있다"고 전했다.

은행의 대출은 크게 개인대출과 기업대출로 나뉘고,기업대출은 다시 대기업대출과 중기대출로 구분된다. 중소기업기본법에 따라 제조업의 경우 상시 근로자 수 300인 미만 또는 자본금 80억원 이하 기업,병원 등의 서비스업은 상시 근로자 수 300인 미만 또는 매출액 300억원 이하 기업은 중소기업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병원장 등 자영업자의 개인 신용대출을 중기대출로 전환하는 데 제도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은행 측 입장이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중소기업기본법에 따라 1인 사업자들도 중소기업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전문직 자영업자들에게 중기대출을 해주는 데 대한 부담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이 출자한 SPC에 대출한 경우 이를 대기업대출이 아닌 중기대출로 재분류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은행들은 대기업이 출자한 SPC는 규모가 작더라도 상호출자제한집단 규정을 바탕으로 대기업대출로 분류해 왔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SPC가 어느 기업군에 해당하는지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은행이 임의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며 "최근에 SPC를 중소기업으로 분류하는 방식으로 중기대출 목표치를 채워넣는 사례가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검증되지 않은 기업대출을 확대해 부실을 늘리기보다는 대출을 갚을 여력이 되는 곳에 돈을 빌려줄 수밖에 없다"며 중기대출 독려의 부작용을 우려했다.

이 같은 은행들의 움직임에 대해 금융감독당국은 은행에 도의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있겠지만 이를 제도적으로 막기는 어렵다는 반응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중기 분류 기준에 위반되지 않기 때문에 고소득 자영업자 개인대출을 중기대출로 전환하는 것에 대해 제재를 가하긴 힘들다"며 "다만 실물부문의 어려움을 지원하고자 하는 당초 취지에서 벗어난 만큼 현장 조사 등을 거쳐 어떤 지도방침을 세울지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