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닷컴]중견 조선소 A사의 B과장은 최근 고향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이런 얘기 꺼내기가 좀 그렇긴 한데….너 요즘 월급 안 나온다며?” 황당한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졌다.“어디서 그래요? 우리는 연말에 보너스까지 받았는데.”전화는 어머니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한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와 친척들이 하나 둘 속을 긁었다.B과장은 “월급에서 일괄적으로 불우이웃 성금까지 떼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미심쩍어 하는 눈치들”이라며 “중소 조선업체들이 어렵다는 얘기가 매일 터져나온 탓에 멀쩡한 업체들도 도매금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경기침체로 한계상황에 처한 기업들이 증가하면서 ‘악성 루머’에 시달리는 업체들도 늘고 있다.감원 감봉 공장폐쇄 등 ‘불황형 단어’들이 루머의 단골 메뉴다.외환위기를 겪은 때문일까.불에 덴 상처처럼 조그만 자극에도 반응이 날카롭다.결국 ‘해프닝’으로 끝이 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웃고만 넘길 일이 아니다.불황의 골짜기에서 번져나오는 우울한 연초 풍속도다.
◆“거기도 어렵다던데….”
지난 달 31일 동국제강은 ‘브라질 세아라 스틸 공장 건설 재검토’라는 공시를 냈다.2005년부터 몇 차례 반복해 오던 공시였지만 이번엔 파장이 달랐다.일부 매체에서 ‘브라질 고로 건설 재검토’라는 제목을 달아 비중 있는 크기로 기사를 내보낸 것.동국제강이 추진 중인 최대 해외 프로젝트가 무산될 것이라는 뉘앙스를 담았다.

곧바로 홍보실에 전화가 빗발쳤다.기사가 사실이라면 주가에 곧바로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일이었다.그러나 결론은 ‘오보’였다.동국제강 관계자는 “브라질이라는 단어만 보고 지레짐작으로 기사를 작성하는 바람에 엉뚱한 분란이 벌어졌다”고 해명했다.동국제강은 2005년 브라질에 전기로를 지어 슬래브를 만드는 공장을 지으려고 검토했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계획은 수정됐다.전기로에서 고로로 투자계획을 훨씬 크게 확대한 것이다.당연히 이전 슬래브 공장 계획은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고 그 이후 6개월 마다 ‘재검토’공시를 의무적으로 반복했다.증권업계 관계자는 “철강업체가 어려우니까 당연히 대규모 투자계획을 철회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단한 것이 사건의 발단인 것 같다”고 풀이했다.

국내 ‘빅3’ 조선업체에는 조선소가 언제까지 쉬느냐는 전화가 종종 걸려온다.이 역시 원인은 경기침체.작년 하반기부터 수주 전선에 비상등이 켜졌다는 뉴스가 루머로 증폭됐다.최근 들어 줄줄이 공장 문을 닫는 자동차업체처럼 조선업체도 조선소 야드를 놀리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다.조선업체 관계자는 “국내 대형 조선사들은 미리 받아 놓은 수주가 4년치에 달하기 때문에 야근과 특근을 할 정도로 어느 때보다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연말 연초에 줄을 잇는 인사발표에도 주변의 반응이 예년같지 않다.승진자 명단에 이름이 없거나 비슷한 직급에 다른 사람 이름이 오르면 “짤린 것 아니냐”는 걱정을 듣는다.최근 사장 인사 발표를 한 모기업은 이로 인해 뜻하지 않은 홍역을 치렀다.기존 사장 외에 최고운영책임자(COO) 자리에 또 한 명의 사장을 임명했는데 이 사실이 와전된 것.평상시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일이지만 ‘기존 사장’의 심기는 편치 않았다.

감봉에 대한 뉴스도 파급력이 크다.한 기업이 임금을 30% 정도 삭감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같은 업종의 비슷한 기업에 다니는 직원들도 주변으로부터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유동성’에 대한 루머도 자주 등장한다.특정기업의 현금흐름에 문제가 있는 듯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여기에 살이 붙고 뼈가 생겨 빠르게 변형·유통된다.‘오프라인 댓글’이 붙는 셈이다.최근 무리한 기업 인수·합병(M&A)으로 유동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는 한 기업의 관계자는 “현금흐름이 양호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위험 수위에 있는 것도 아닌데 주변의 우려가 지나치다”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소문이 실제 현실이 돼 버리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