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첫 월드컵서 4강신화를 일궈 한국의 저력을 전세계에 떨치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던 거스 히딩크. 3백50년 전 하멜표류기로 '조선'을 유럽에 알린 헨드릭 하멜. 둘 다 네덜란드인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역사의 아이러니로 돌리기에는 네덜란드와 한국의 인연이 너무도 깊다. '하멜에서 히딩크'에 이르기까지 네덜란드는 한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창(窓)'의 역활을 해온 셈이다. 히딩크가 동방의 나라 한국으로 오기 3백70여년 전인 1627년. 조선 인조 5년이던 이 때 얀 얀스 벨테브레라는 네덜란드인이 무역을 위해 일본으로 가던 중 조선에 표류하게 된다. 서울로 후송된 후 훈련도감에서 화약기술을 전수하고 병자호란에 참전하기도 한 벨테브레는 조선여인과 결혼, 두 자녀까지 두었다. 조선 최초의 서양 귀화인인 박연이 바로 그다. 박연이 한반도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던 조선 효종 4년(1653).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원을 태운 상선이 난파돼 제주도 산방산 앞에 표착했다. 생존자 36명이 조선에서 억류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중 한 명이 배의 서기였던 하멜이었다. 하멜은 13년 후 동료 7명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 2년 뒤 네덜란드 고향으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썼다. 이 책은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으로 잇따라 출간될 만큼 인기를 모았다. 하멜은 서양에 '코리아'를 소개한 최초의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양국간의 인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세 사람은 1907년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뤄진 부당한 것이란 걸 알리기 위해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고 있던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회의장에 발도 들여 놓지 못한 이준은 현지에서 순국했다. 이준 열사의 유해는 헤이그시 외곽 묘지에 묻혔다가 반세기 만인 1963년 조국의 땅으로 돌아왔다. 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4천명의 군대를 한국에 파병했다. 유럽에서는 영국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박연의 후예인 히딩크가 21세기 문턱을 넘어선 올해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받은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히딩크는 전생에 한국의 장군이었을 것"이라는 네덜란드 한 일간지의 촌평이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하멜 표류 3백50주년이 되는 내년 양국에서는 다큐멘터리 방영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네덜란드 영화기획사는 한국인 입양아가 20년 만에 모국을 방문, 하멜의 항로를 다시 따라가는 영화를 제작 중이다. 오광진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