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15일 오전 5시. 한대우 산업은행 대우팀장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서울 남산 힐튼호텔을 나섰다. 밤샘 협상에 지친 몸은 물먹은 스펀지처럼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모처럼 가벼웠다. GM측과 본계약 타결의 최대 쟁점이었던 대우자동차 자산매각 가격과 부평공장 처리문제를 한꺼번에 마무리지었기 때문이었다. 대우차 매각사무국이 GM의 닉 라일리 신설법인 사장 내정자, 앨런 페리튼 아태지역 전략본부장 등과 힐튼호텔에서 만난 것은 3월11일. 대우차 매각 협상은 최대 고비를 맞고 있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GM이었다. 해외법인의 우발채무를 전면 사후 보장해주고 자산 인수가격을 깎아달라고 요구했다. 매각사무국은 양해각서상의 가격조건을 유지해야 한다고 맞섰다. 12억달러라는 실물자산 가격은 채권단의 '마지노선'이라는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대신 우발채무를 부분적으로 보장해줄 수 있다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3월14일 산업은행은 GM에 최후 통첩을 날렸다. "양해각서의 기본 틀을 흔들면 본계약 체결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작은 조건을 밀고 당기기보다는 세부 쟁점들의 일괄타결을 노린 승부수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GM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협상이 깨지면 채권단도 부담이지만 GM이 입게 될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GM은 이미 신설법인 사장까지 내정한 상태였고 지난 2년5개월 동안 최소 1천만달러 이상의 인수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GM은 가격부문을 양보해 양해각서 원안에 동의했다. 대신 인수범위 축소와 우발채무 부분 해소방안은 자신들의 의견대로 관철시켰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채권단은 내친 김에 부평공장 조기 인수를 들고 나왔다. 2001년 9월 양해각서 체결협상 때도 쟁점이 됐던 문제였다. GM측은 반발했지만 산업은행의 강공 드라이브에 또 한 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생산성 노사관계 등 몇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될 경우 3년내 조기 인수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2000년 9월 포드의 인수포기 이후 줄곧 수세에 몰려온 채권단의 '벼랑끝 승부수'가 작렬하는 순간이었다. 산업은행은 압도적인 화력을 믿고 '적진' 깊숙이 들어온 GM에 후퇴를 거듭하다가 한순간에 돌아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물론 GM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 것은 결코 아니다. GM은 고작 4억달러를 들여 그 어느 나라보다 폐쇄성이 강한 한국 자동차시장의 일각을 무너뜨렸다. 돌이켜 보면 대우차 매각 과정은 지난 10일 정건용 산업은행 총재가 얘기한 대로 "칼자루는 GM이 쥐고 칼날은 우리가 쥐고 있는 상황"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99년 워크아웃 당시 대우차의 회계시스템은 엉망이었고 '세계경영'을 앞세운 글로벌 네트워크는 붕괴 일보 직전이었다. 내부 구조조정도 외부의 강제적인 힘 없이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많은 전문가들은 대우차를 제때 팔았더라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들 중의 상당수는 과거 대우의 세계경영이 맹위를 떨칠 때는 침묵했던 사람들이고 오히려 적극 옹호하기까지 했었다. 과거를 추론하는 것은 의미없고 미래를 예단하는 것 역시 속절없는 일이다. 서울대 주우진 교수(경영학)는 대우차 매각의 본질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대우차는 이제 GM의 품에 안기지만 여전히 한국속의 기업이다. 하도급기지로 전락하든 동북아의 전략기지로 비상하든 이제 대우차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대우차에 또 다른 시련이자 기회가 될 것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 ----------------------------------------------------------------- ◆ 알림 ='대우자동차'편은 이번으로 끝을 맺고 다음회부터는 '사공 많은 하이닉스'편을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