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진 이디 사장 >

평생 자가용도 없이 전철과 버스를 타고 다닌 벤처기업인.

허름한 집에서 살던 그가 거액의 보유주식 전부를 회사와 종업원을 위해 내놨다.

그러면서 사장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산에서 쓰레기를 줍는 환경운동으로 제2의 인생을 살기로 했다.

서울 방배동에 있는 과학기기업체 이디의 박용진(62)사장.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회사 주식 2백70만주를 지증했다.

싯가로 1백80억원대에 이른다.

노후를 위해 단지 6억원을 받기로 했다.

주식중 50만주를 종업원에게 싯가보다 훨씬 싸게 파는 형식으로 이 액수를 받기로 한 것.

나머지 2백20만주는 회사에 위탁해 처리토록 했다.

주식으로부터 생기는 과실의 일부를 고아와 같은 불우이웃을 위해 쓰는 조건이다.

회사측은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이 주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그는 창업 20주년이 되는 21일 사장직에서 물러난다.

신임 사장에는 박용후 상무가 취임한다.

박 사장은 다음주부터 비닐봉지와 집게를 들고다니며 북한산과 관악산에서 쓰레기를 주울 계획이다.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환경운동에 나서는 것이다.

이 일이 기업경영 못지않게 의의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이디는 학교용 실험실습장비와 계측기기를 만들어 작년에 2백40억원의 매출과 8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린 코스닥 등록기업이다.

직원은 1백20명.

국내 시장점유율은 실험실습장비가 60%,계측기기가 30%에 이른다.

연간 수출액도 2백만달러나 된다.

1백여종의 제품중 컴퓨터 설계도면을 지면에 옮겨주는 X-Y플로터 등 4종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개발했을 정도로 기술력도 있다.

박용진 사장은 독특한 경영철학을 가진 기업인이다.

명함에 사장 직함이 없다.

회사명과 이름 석자 뿐.

책상위에도 사장 명패가 없다.

주식보유액으로 따지면 갑부소리를 들을만 하지만 사는 곳은 서울 능동에 있는 30여평짜리 단독주택.

그것도 20여평짜리에 살다가 최근에야 옮긴 것.

자가용도 없다.

택시조차 잘 안탄다.

만원 지하철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며 다닌다.

아들이 둘(한국코아와 삼성전자 평사원)이나 있는데도 이들에게 주식을 한주도 물려주지 않았다.

경영권도 친인척 관계가 없는 자사 임원에게 넘긴다.

그는 자식들을 회사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대학공부까지 시켜줬고 장애인도 아닌 만큼 스스로 땀흘려 먹고 살라는 것.

박 사장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광운공고 전신인 동국무선공고를 나왔다.

LG전자 방송협회를 거쳐 직원 1명으로 1980년 창업해 굴지의 과학기기업체로 키웠다.

독특한 철학을 갖게 된데는 까닭이 있다.

창업당시에는 경제가 어려웠다.

오일쇼크 후유증과 정권교체가 겹쳐 부도가 속출했다.

그런 와중에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는 얘기가 유행했다.

극소수 부도덕한 기업주들 때문에.창업을 하면서 이런 기업인이 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소유자가 아닌 관리자가 되겠다고 다짐한것.

법인으로 전환하던 1986년 갖고 있던 주식 3분의 2를 임직원에게 무상으로 나눠준 것도 이 때문.

박 사장은 기술자출신.

전자부품을 납땜하고 조립하는 것을 천직으로 여겼다.

사장이 돼서도 연구실에서 밤늦도록 일할 때가 많았다.

작고 마른 체구지만 어린이처럼 천진한 얼굴을 지녔다.

매일 오전 6시30분 집을 나와 능동역 건대역을 거쳐 방배역에서 내린뒤 숨이 턱까지 차는 오르막길을 걸어 회사로 들어서곤 했다.

자신이 복도에 붙여놓은 헤브라이 동요를 읽은 뒤 일을 시작해왔다.

"밝은 빛을 따라서 앞으로만 가자.내마음을 지키며 앞으로만 가자.우리 함께 걸으면 걱정할게 무어냐.갈길 멀고 험해도 노래하며 나가자..."

하지만 이제는 방배동에서 박 사장 모습을 더이상 볼 수 없게 된다.

21일 성남의 연구소에서 간단한 이임식을 가진뒤 흩날리는 벚꽃을 맞으며 전철을 타고 떠난다.

< 김낙훈 기자 nhk@ked.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