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새아침이다.

세기말이자 뉴 밀레니엄(새 천년)을 꼭 1년 앞둔 날이다.

여느 해 첫날과는 의미부터가 다르다.

한치 앞도 안보이던 어둠의 터널도 새 천년의 여명을 받으면서 그 끝을
드러내고 있다.

내리 꽃히기만 하던 각종 지표들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얼어 붙었던 산업현장에서도 온기가 감지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내일을 장담할 수는 없다.

국가부도라는 파국의 탈출구가 어렴풋이나마 가시권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시그널일 뿐이다.

사상초유의 대량실업과 구조조정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치렀지만 앞날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천년 세월의 교차점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다.

변화의 격랑은 낡은 사고의 틀을 용납하지 않는다.

가치체계와 의식구조를 "새 천년형"으로 바꾸라고 강요한다.

돌이켜 보면 환란은 단순한 "경제적 위기"가 아니었다.

변화를 거부한데 대한 천형이었다.

빚 덩어리가 되더라도 덩치만 키우면 된다는 양적 팽창제일주의, 부채로
세운 모래성을 "신화"라고 자랑하던 어리석음, 관치의 매력을 끝내 놓지
않으려는 오만한 관료주의...

시대와 상황을 역행하는 이런 진부한 시스템들이 어우러져 빚어낸 합작품
이었다.

몇가지 경제지표의 호전을 놓고 국제통화기금(IMF)체제 극복이라고 해석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잘못된 금융기관과 기업 몇개를 "구조조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문제를 일으킨 일부 기능적 결함을 손질하는 차원으로는 "새 나라"가
세워지지 않는다.

변화의 물결을 타지 못하고 있는 모든 제도와 관습, 가치관들을 송두리째
바꾸지 않으면 "제2의 건국"은 불가능하다.

국가와 관료의 존재이유, 기업의 행태와 목표, 사회 시스템, 개개인의
인식의 틀을 근원부터 다시 짜야 한다.

바로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으로의 전환이다.

그 방향은 성장본위에서 창조중심으로,물질에서 정보와 지식으로,
자산축적에서 가치창조로, 규모에서 시스템으로, 집권화에서 분권화로의
변화다.

"제2건국"의 이념적 토대도 새로운 패러다임 위에 세워져야 한다.

한국경제신문이 새해 주제를 "새 천년 준비"로 정하고 그 첫번째로
"패러다임 쉬프트"를 강조하는 것도 미래형으로의 전환을 촉진하기 위해서다.

패러다임 전환은 관료주의 파괴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정부의 몹집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존재이유도 새로운 시각에서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업은 활동동기 자체를 창조적 저성장 체제로 바꿀 때다.

정보와 지식이 주도하는 탈산업사회에 부합하게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한창 진행중인 구조조정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전제하지 않는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유일하게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가고 있는 정치권은 책임에 걸맞게 가장
강도높은 자구노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IMF 체제는 우리에게 위기인 동시에 기회다.

시련을 주었지만 새로운 틀로 거듭날 명분과 계기도 제공했다.

이제 새로운 도전의 모티브는 주어졌다.

그것은 "변화"다.

패러다임 시프트다.

< 정만호 국제부장 manho@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