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하남산업단지 17블록 5호에 있는 세협테크닉스에 들어서면 대문
오른편에 수위실이 있다.

이 수위실을 열고 들어가면 안쪽에 4평정도 되는 작은 방이 보인다.

이 회사의 박정수 사장은 요즘 이 방에서 잠을 잔다.

2천5백평부지에 첨단 다이캐스팅공장을 가진 기업의 사장이 수위실에서
거처하다니.

누구든 이 사실을 알면 의아해진다.

이에 대해 박사장은 "집에 갈 틈이 없어서"라고 대답한다.

박사장이 수위실에서 잠을 자야 할 만큼 바빠진 건 무역업을 하다가
제조업에 새로 뛰어들면서부터.

지난 84년 서울에서 세협양행이란 무역업체로 출발한 박사장은 10년간
자동화기계류 수출입업으로 짭짤한 재미를 봤다.

일본 와도엔지니어링의 한국대리점으로 삼성전자를 비롯 LG전자 대우전자
등에 납품하면서 큰 어려움없이 사업을 해왔다.

그러나 직접 전자부품을 제조해보기로 하면서부터 너무나 바빠지기
시작했다.

공장을 새로 지어 첨단부품을 개발, 생산한다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울
줄은 몰랐다.

더욱이 지난해초 시험가동을 거쳐 양산체제를 갖췄는데도 납품을 받기로
한 전자회사에서 품질승인 및 검사절차를 6개월이나 미루는 바람에 모든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그동안 납품을 받던 기업이 중국으로 제조설비를 옮기는 과정에서 부품
주문량을 일시적으로 줄여 타격은 더욱 컸다.

이에 따라 심각한 자금난까지 겪게 됐다.

박사장은 이때엔 정말 제조업에 손을 댄 걸 크게 후회했다.

그러나 박사장은 여기서 오히려 역공법을 썼다.

매출이 올라가지 않는데도 거꾸로 기술개발부문에 과감히 투자한 것이다.

비디오헤드드럼을 주생산품으로 하는 이 회사로서는 다이캐스팅기술을
정밀화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박사장은 알루미늄 주조를 진공밸브 및 진공흡입장치를 이용하는 방법을
개발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자체기술진으로서 원자재용해과정 및 진공장치의 노하우를 알아내는
데엔 힘이 들었다.

1년간 실패를 거듭한 뒤에야 일본에서 들여온 수입품을 능가하는 진공
다이캐스팅 헤드드럼을 개발해냈다.

이 기술이 개발되면서부터 사태가 급변했다.

곳곳에서 주문이 밀리기 시작한 것.

대우전자가 비디오드럼과 드럼베이스를 주문했다.

만도기계는 모터부품을 주문했고 삼성전기 중국공장은 헤드드럼을
주문했다.

일본의 JVC 소니 등 비디오 메이커들도 세협테크닉스의 부품을 수입해
가겠다고 나섰다.

삼성은 광주공장의 생산라인중 일부를 세협에 대여해준 뒤 단계적으로
시설을 이전해주기로 했다.

이에따라 연 12억원규모의 로토코어 등 10종의 부품을 납품할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됐다.

또 명화 계양전기 삼성자동차 등도 관련부품조달을 요청해왔다.

이같은 주문량증가 덕분에 세협테크닉스의 매출은 올해 적어도 80%정도
성장할 전망이다.

모험적인 대규모 기술개발투자가 이 회사를 살려낸 것이다.

주문이 밀리면서 박사장은 더욱 바빠졌다.

때문에 수위실 뒷방에서 잠을 자는 날도 더욱 늘어나고 있다.

< 이치구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