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원유 정제능력은 세계 9위를 기록하고있다.

여기에까지 이른 한국의 석유산업 역사는 62년 대한석유공사(현재의
유공)가 설립돼 그해 4월 미국의 UOP사와 공장건설을 위한 기술용역계약을
체결하면서 시작됐다.

이전까지는 일제시대와 해방후 미군정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석유를
외국에서 전량 수입했었다.

대한석유공사의 울산정유공장이 64년4월1일 정상가동에 들어감으로써
석유류제품의 수입대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가동초기의 정제능력은 하루 3만5,000배럴. 이후 30년이지난 94년말
현재의 정제능력은 하루 170만배럴로 48배가 늘어났다.

이 정제능력은 세계 9위이다.

또 당초 유공 1개사로 출발한 정유회사가 5개로 늘어났다.

호남정유가 67년,경인에너지(현재의 한화에너지)가 69년에 설립됐다.

쌍용정유가 76년에 출범했고 현대정유는 지난93년 극동정유(64년설립)를
전신으로 태어났다.

한국의 정유산업은 이에따라 이미 70년대에 독점공급체제에서 벗어나
시장경쟁체제가 자리잡게 됐다.

그러나 80년초반까지도 국내 석유류시장의 경쟁상태는 국내의 경제규모
확대로 인한 폭발적인 수요증가로인해 사실상 공급자시장이 지속됐다.

또 70년대에는 두차례의 오일쇼크로 국내 정유산업이 일대 고비를
맞게된다.

79년의 2차쇼크직후에는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란등
페르시아만 3개국에 집중됐던 원유도입선을 다변화하는 안정적인
원유공급원확보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또 오일쇼크를 계기로 걸프사및 NIOC사와 유니온사가 지분을 정리함으로써
유공과 한화에너지가 순수한 국내자본으로 경영되는 전기를 맞게됐다.

이후 80년이후에는 정부의 소비억제책으로 다소 줄었던 석유소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소비증가와 더불어 수요구조가 벙커C유같은 중질유 중심에서 휘발유
경유같은 경질유위주로 바뀌는 시장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90년들어서면서는 주유소가 한 정유회사의 제품만을 의무적으로 팔아야
하는 폴사인제가 실시되고 주유소 거리제한이 풀리면서 정유회사들은
소매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