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사업을 두고도 현대자동차그룹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탈출’에 나선 서방 업체와 달리 현지 생산시설에 과감하게 투자해온 현대차그룹은 매몰비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현지 사업을 펼치다간 잘나가는 미국과 유럽에서 소비자의 눈총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동시에 나온다.

8일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러시아 전체 신차 판매량은 3만2412대로 전년 동월 12만9231대에서 74.9% 급감했다. 전쟁 장기화와 이에 따른 ‘러시아 혐오’(루소 포비아) 확대로 유럽계 완성차 업체들의 시장 철수가 잇따르면서다. 지난 5월 현지 자회사와 공장 지분을 러시아 정부에 모두 넘기고 떠난 프랑스 르노그룹에 이어 현지 언론은 최근 독일 폭스바겐도 칼루가 공장 매각을 추진 중이라고 전했다. 르노 점유율은 지난해 7월 8.7%에서 1년 만에 5.1%로, 폭스바겐(스코다 포함)은 같은 기간 11.6%에서 3.7%로 급감했다.

현지 시장 2위였던 현대차·기아 점유율도 소폭 하락했다. 합계 23.6%에서 22.5%로 줄며 24.8%에서 31.8%로 치솟은 러시아 브랜드 라다(LADA)와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현대차와 기아는 지난 6월 현지 공장에서 러시아 내수 물량을 단 한 대 생산하는 데 그쳤지만 재고와 국내 일부 수출 물량으로 대응하고 있는 상황으로 알려졌다. 이를 틈타 중국 업체들이 점유율을 빠르게 늘리는 모습이다.

현대차그룹에 러시아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현대차그룹은 최근 수년간 러시아 투자를 늘리며 현지화에 속도를 냈다. 연 20만 대 규모의 기존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에 만족하지 않고 2020년 같은 도시에 있는 연 10만 대 규모의 옛 GM 공장을 인수해 리모델링을 했다. 이를 포함해 신규 투자한 매몰비용만 5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복잡한 국제 정세와 소비자 정서가 현대차그룹으로선 부담이다.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판매가 크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눈총을 받을 수 있어서다. 조연주 NH투자증권 글로벌전략 연구원은 “루소포비아는 오랫동안 견고해진 서방인의 집단 잠재의식”이라며 “전쟁이 끝나도 그 흔적은 오래 남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한신 기자 p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