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북핵위기 막전막후…김일성 "핵무기 만들 이유도 돈도 없다", 김영삼 "거짓말"
[외교문서] "커브볼같이 들어온 경수로 제안"…북의 NPT 탈퇴를 막아라
"경수로 문제가 야구 시합으로 비유한다면, 초구로 들어온 커브볼처럼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북측의 제안은 핵 비확산을 향한 진척(development)으로 볼 수 있으므로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본다"(1993년 7월 19일 2차 북미 고위급 회담 합의 후 미국 평가)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시작된 '제1차 북핵 위기' 속 북미의 치열한 수싸움이 당시 문서를 통해 공개됐다.

29일 외교부가 공개한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에선 북한을 NPT에 묶어두기 위한 미국 정부의 외교 노력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핵과 안전보장의 교환'이라는 북미 협상의 기본 구도가 윤곽을 드러내던 시기이기도 했다.

북미 2차 고위급 회담 합의에 처음 담긴 '경수로 지원' 문제는 이듬해 한반도 전쟁 고비를 넘겨 어렵사리 성사된 3차 회담에서 역사적 '제네바 합의'의 핵심 사항이 됐다.

◇ "경수로, 중요한 돌파구 될 것"…갈루치의 기대
북한은 영변의 미신고 핵시설 2개소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압력과 한미의 팀스피릿 훈련에 반발해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를 선언했다.

미국은 애초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과 고위급 접촉을 하는 건 "당분간 고려하지 않을 것"(3월 26일 한미 외무장관회담)이라는 입장이었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중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중국이 권유해온 대북 고위급 접촉을 수용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6월 2∼11일 미국 뉴욕에서 1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렸다.

후일 제네바 합의까지 북미협상을 이끈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와 강석주 북한 외교부 제1부부장이 대표로 나섰다.

난항을 이어가던 협상은 6월 7일 북한의 요청으로 케네스 퀴노네스 당시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과 리용호 북한 외교부 국제기구국 부국장(후일 외무상·외교문서에는 '이영호'로 표기) 실무접촉을 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실무접촉에서 북측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미국의 지원, 내정불간섭, 자위 경우를 제외한 무력불행사,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지지의 4개 항이 포함된 북미 공동성명을 채택하는 조건으로 NPT 탈퇴 결정을 보류하겠다고 통보했다.

나흘 뒤 북한의 NPT 탈퇴 유보와 미국의 무력 불행사 등을 담은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한 달여 뒤인 7월 14∼19일 제네바에서 열린 2차 고위급 접촉에서 북한은 "현재 가동 중인 모든 흑연방식 원자로를 경수로 방식으로 전환하는 데 미국이 협조한다면 모든 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의를 내놓았다.

[외교문서] "커브볼같이 들어온 경수로 제안"…북의 NPT 탈퇴를 막아라
갈루치 차관보 등 미국 협상팀은 이 제안이 돌파구로서 상당히 유용할 수 있다고 평가했던 것으로 외교문서에 드러난다.

북한은 경수로 제안이 '김일성의 구상'이라며 "현재 운용 중인 원자로, 건설 중인 원자로 및 핵무기 관련시설(재처리시설)을 모두 폐기할 용의"를 표했다고 갈루치 차관보는 합의 타결 후 주제네바 한국대사에게 설명했다.

갈루치 차관보는 이후 한승주 외무장관과 통화하면서 "작지만 중요한 진전을 이룩했다"며 "경수로 문제는 미국이나 한국 정부에 하나의 중요한 돌파구(significant opening)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의구심도 드러냈다.

제네바 현지에 체류하던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은 북한 측이 경수로 방식 전환 문제를 들고나온 것은 "지연전술 책동이 아닌지" 우려를 표했다.

◇ "NPT 영구 잔류-관계정상화'…김계관이 손으로 써 건넨 '일괄타결안'
2차 회담 이후에도 IAEA 사찰 등 핵 문제엔 진전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 10월 개리 애커먼 미국 하원 외무위 동아태 소위원장의 방북이 또 다른 분기점이 됐다.

애커먼 소위원장을 수행한 퀴노네스 담당관에게 평양 출발 직전 북한 김계관 외교부 순회대사(후일 6자회담 수석대표)가 '손으로 정리'해 전달한 메모엔 북측이 제시하는 '일괄타결 방안'이 담겨 있었다.

북한의 ▲ NPT 영구 잔류 ▲ 특별사찰 포함 IAEA와의 완전한 협력 등과 미국의 ▲ 핵무기 등 무력 불사용 법적 보장을 포함한 평화협정 체결 ▲ 외교관계 완전 정상화 ▲ 남북한 균형정책 약속 등을 맞바꾸자는 것이었다.

북한은 이를 제3차 북미접촉에서 최종 합의하고, 대강의 내용을 타결하기 위해 강석주와 갈루치가 사전에 비밀 접촉을 갖자고 제의했다.

퀴노네스 담당관이 방북 후 한국 측에 설명한 내용을 보면 북측은 "강석주의 입장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비밀 접촉은 팀스피릿 훈련 중단 전에 북미대화를 허용하지 않는 군부 몰래 진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 내부의 알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퀴노네스 담당관의 설명을 들은 한국 측은 평화협정, 균형정책 등 북한 측 요구의 '위험성'을 상세히 지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한미의 대북 대응 조율 과정은 녹록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교문서] "커브볼같이 들어온 경수로 제안"…북의 NPT 탈퇴를 막아라
1차 북핵 위기 당시 북한은 IAEA 사찰 등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면서도 핵무장 의사가 없다는 주장을 반복하기도 했다.

애커먼 소위원장이 방북 후 방한해 김영삼 대통령을 만난 '면담요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애커먼에게 "북한에는 핵무기가 없고, 제조 능력도 없으며, 핵무기를 제조할 이유나 동기도 없으며, 돈도 없다"고 말했다.

이를 전해 들은 김 대통령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라며 "위성촬영 등 여러 정보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북한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NPT 탈퇴 전후 심상치 않았던 북한의 외교적 움직임도 일부 나온다.

외무부가 3월 19일 작성한 '북한의 NPT 탈퇴 관련 보고' 문서엔 홍콩 총영사관이 입수한 것이라며 김일성의 총리급 특사가 NPT 탈퇴일인 3월 12일 전후로 중국에 파견돼 팀스피릿 비난 성명 발표 등을 요청했다는 정보가 기록돼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