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T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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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공연장에서 수천 명이 모인 콘서트 직전 무차별 총격과 방화 테러가 벌어지면서 최소 60명이 숨지고 140명 이상이 다쳤다. 이날 총격 직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가 배후를 자처했다.

22일(현지 시각) 저녁 모스크바 북서부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에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괴한 여럿이 침입해 총기를 난사했다.

처음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이 공격으로 최소 40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다친 것으로 잠정 확인됐다고 밝혔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망자와 부상자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현지 언론은 사망자가 최소 62명으로 늘었고, 부상자도 최소 146명으로 집계됐다고 전했다. 사망자 중에는 어린이들도 포함돼 있으며, 병원으로 옮겨진 부상자 중 일부는 위중한 상태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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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차림 괴한들 공연 직전 난입..."총 쏘고 폭탄 던졌다"

사건 현장인 크로커스 시티홀은 행정구역상으로는 모스크바시 바깥이지만 실제로는 지하철과 순환도로로 모스크바 시내와 긴밀히 연결돼 있고, 크렘린궁과의 거리도 20㎞에 불과하다. 약 6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건물 내 공연장에선 이날 저녁 러시아 유명 록밴드 피크닉(Piknik)의 콘서트가 예정돼 있었다.

테러 발생 당시 공연장 내에 있었던 관객 중 한 명인 알렉세이는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공연 시작을 불과 몇분 남겨놓고 총을 연발로 쏴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관객은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갑자기 우리 뒤에서 폭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총을 여러 차례 쏜 건지 연발사격이었는지는 모르겠다"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기 시작했고 모두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렸다.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달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은 비상사태부 당국자를 인용, 크로커스 시티홀을 공격한 건 자동화기를 든 군복차림의 괴한들이며 이들의 숫자는 최소 2명에서 5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텔레그램 등 소셜미디어에는 괴한들이 공연장 홀 내부와 같은 건물 내 쇼핑몰에서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올라와 있다. 바닥에 총에 맞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고,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출구로 몰려 탈출을 시도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도 유포되고 있다.

일부 관객은 객석 아래에 몸을 숨겼고, 지하나 옥상으로 도주한 이들도 다수였다. 공연장에 있었던 러시아 리아 노보스티 통신 기자는 테러범들이 총격을 가한 뒤 '수류탄' 혹은 방화용 '소이탄'으로 보이는 폭발물을 던져 불이 나는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테러범들이 도주한 뒤 크로커스 시티홀 건물에선 대형화재가 발생해 지붕 일부가 무너지는 등 심각한 피해를 남겼다.

비상사태부는 긴급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건물 지하에서 약 100명을 대피시켰고, 옥상에 고립된 이들을 구해내기 위해 구조작전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인근 응급의료시설에서는 부상자를 실은 구급차 수십 대가 잇따라 도착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러시아 연방수사위원회는 이번 사건을 테러로 간주하고 용의자들을 추적 중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당국은 공항 등 주요시설을 중심으로 모스크바 일대의 경계수위를 높이는 동시에 전국에 대규모 공공 행사를 취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7일 마무리된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5선에 성공한 푸틴 대통령은 이날 테러가 발생한 지 수 분 만에 첫 보고를 받았다고 크렘린궁은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23일 새벽 당국 회의를 소집하고 대응책을 논의했으며 부상자 회복을 기원했다고 크렘린궁 측은 밝혔다.
사진=A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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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수백명 사살 후 기지로 철수" 주장...미 "IS 소행 맞다"

IS의 아프가니스탄 지부인 이슬람국가 호라산(ISIS-K)은 자신들이 이번 공격을 자행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IS 선전매체 아마크 통신을 통해 "(IS 전투원들이) 수백명을 죽이거나 살해하고 해당 장소를 크게 파괴한 뒤 무사히 기지로 철수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정부는 아직 이번 사건의 배후를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번 공격이 실제로 IS의 소행이라는 걸 확인하는 정보를 갖고 있다고 미국 정부 당국자는 22일 말했다. 이 당국자는 이미 몇 주 전부터 미국이 러시아에 테러 위험을 경고해 왔다고 주장했다.

다만 백악관은 앞서 미 대사관이 언급한 '공격 계획'이 이번 테러와 연관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해당 미 대사관의 경고에 관한 질문에 "이번 사건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라면서 "이번 사건에 대해 우리가 사전에 알았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2015년 시리아에서 바사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정부군과 손잡고 내전에 개입, 당시 시리아와 이라크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IS를 격멸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로이터 통신은 지적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번 사건을 '극악무도하고 비겁한 테러 공격'으로 규정하며 강하게 규탄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워 온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 각국도 테러를 비난하면서 러시아 국민에게 조의를 전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끔찍한 총격의 희생자들을 애도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번 사건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 듯 "우크라이나나 우크라이나인이 사건에 연루됐다는 징후는 없다"고 덧붙였다.

프랑스 외교부는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혐오스러운'(odious) 공격이 자행됐다고 규탄했고,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도 성명을 통해 "모스크바의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건 경악스럽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옛 소련의 일부였던 국가들과 중동 각국도 잇따라 테러를 규탄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러시아와 3년째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미하일로 포돌랴크 대통령 고문은 이날 공격이 우크라이나와 무관하다며 선을 그었다.

이어 우크라이나 외교부는 우크라이나에 화살을 돌리는 메드베데프 등의 주장은 "러시아 사회의 반(反)우크라이나 히스테리에 기름을 부으려는 계획적 도발"이라고 비난했고, 우크라이나 군 정보기관은 이번 참사가 푸틴 대통령 측의 자작극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수진 한경닷컴 기자 naiv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