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 ‘핑크펄’
레스토랑 ‘핑크펄’
“베트남 푸꾸옥 가는데 숙소는 어디로 할까요.”

하이엔드-맞춤 여행사를 운영하는 지인에게 갑자기 던진 질문에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JW메리어트 푸꾸옥 에메랄드베이 리조트&스파. 세계의 숨어 있는 최고급 부티크호텔을 두루 경험한, 필자가 아는 한 최고 여행 전문가로부터 돌아온 답이 흔한 호텔 브랜드라고? 이어진 말에 그 답이 있었다. “빌 벤슬리가 디자인했어. 네 취향이야.”

빌 벤슬리는 누구인가. 궁금했다. 조금 뒤져보니 그가 디자인한 호텔만 두루 다니는 ‘빌 벤슬리 트레일’이라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대체 뭐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궁금증이 샘솟는다. 그의 키워드는 ‘맥시멀리스트’ 그리고 ‘판타지’라는 두 단어였다. 이쯤 되면 이유는 충분했다. 세계 최대 사파리가 있다는 베트남 푸꾸옥-동물 사랑이 지극한 딸과의 약속도 지켜야 하고- 게다가 빌 벤슬리가 디자인한 호텔 중 가장 좋은 가격에 다녀올 수 있다니 분명 최적의 기회였다.
‘JW 메리어트 푸꾸옥 에메랄드 베이 리조트&스파’ 전경.
‘JW 메리어트 푸꾸옥 에메랄드 베이 리조트&스파’ 전경.
거대 자본의 개발 경쟁으로 재미 요소들이 극단적으로 남쪽과 북쪽 끝에 몰려 있는 푸꾸옥을 최대한 즐기고 싶다면 일정을 쪼개 남쪽과 북쪽 숙소를 모두 경험하는 게 좋다. 첫 일정은 북쪽에서 시작했다. 빈펄 사파리를 즐기며 베트남의 열대 정취에 익숙해질 무렵 또 다른 재미를 찾아 남쪽으로 향했다. 푸꾸옥 메리어트에 도착한 순간 “오우! 세다!”라는 말이 터져나왔다. 마치 엄숙한 유럽의 도서관이나 정부 건물에서 마주할 만한 거대한 개 두 마리 조각이 입구를 가득 메운 채 맞이했다.

“라마르크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야말로 맥시멀! 구석구석 관심 갈 만한 것들로 가득하다. 이 호텔은 사실 베트남 푸꾸옥의 버려진 대학이 뼈대라고 직원이 설명했다. 1880년대 푸꾸옥에 거주하던 프랑스인과 지역 주민의 자녀들이 주로 다니던 라마르크대. 아시아럭비챔피언십에서 우승까지 거머쥐며 스포츠 명문으로 이름을 날린 이 학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문을 닫았다. 시간이 흐른 뒤 베트남 선그룹이 이 학교를 발견해 5성급 리조트로 탈바꿈시켰다고 했다. 높은 층고의 리셉션과 여기저기 가득 채운 소품들, 혀를 내두르게 하는 빌 벤슬리, 맥시멀리스트의 컬렉션이 자취를 드러냈다. 열대 지방 특유의 높은 층고, 엉성한 듯 짜임새 있는 각종 장식물은 “진짜 여기가 학교였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리조트 로비
리조트 로비
이윽고 라마르크대의 스튜던트 북이 손에 들어왔다. 대학을 기반으로 설립된 공간인 만큼 편의 시설과 리조트 맵도 책의 형태다. 이국적 풍경 속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차가운 와인, 따뜻한 음식으로 몸과 마음이 푸근해졌을 때 예약한 방에 도착했다. 우리 방은 농대 건물을 개조했다고 소개받았다.

널찍하고 볕이 잘 드는 욕실(특히 편안하게 앉아 샤워를 즐길 수 있는 샤워부스와 사랑스러운 욕조가 킬링 포인트!)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파가 마련돼 있고, 침실엔 커다란 두 개의 침대 주변으로 재미난 강아지 조각과 빌 벤슬리의 판타지를 완성시키는 소품이 넘친다. 바다를 향해 난 창을 여니 널찍한 소파 위로 커다란 천장 선풍기가 돌아갔다. 게으른 독서광을 위한 최적의 공간을 확인하니 긴 여정 (읽지도 않으면서) 무겁게 짊어지고 다닌 책들이 새삼 뿌듯하게 느껴졌다.

이거 꿈이야, 현실이야?

휴식이 목적인 여행이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곳의 콘셉트는 도무지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곧장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향했다. 트랙을 갖춘 잔디 축구장, 커다란 스코어보드 앞으로 학장의 지루한 연설이 이어졌을 운동장과 강연대가 멋지게 자리한다. 캠퍼스엔 천문학, 곤충학, 파충류학, 어류학, 포유동물학 그리고 해양학 등 영어로 명명된 각 단과대 건물들이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컨시어지엔 수백 년간 울렸을 낡은 종들이 늘어서 있었고.
트로피가 전시된 도서관 같은 로비.
트로피가 전시된 도서관 같은 로비.
갑자기 터진 전쟁 탓에 공부하다 징집돼 끌려가야 했던 학생들의 가방과 오래된 이국적인 물건들도 도처에 깔려 있었다. 스포츠 분야에 출중한 실력을 보였다는 라마르크대 역사에 걸맞은 트로피와 각종 스포츠용품이 긴 회랑을 따라 전시되고, 분수와 조경으로 재탄생한 트로피들은 이 학교의 설립자와 역대 학장들 그리고 이곳을 거쳐 간 학생들이 베트남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궁금케 했다.

가장 친절해 보이는 컨시어지 직원에게 다가가 이 대학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빙긋 웃음과 함께 돌아온 놀라운 답. “포로수용소가 유일한 역사적 공간인 이 외진 섬 끝자락에 어떻게 대학이 있었겠어요.”

그렇다. 몇 시간을 꼬박 빌 벤슬리가 정교하게 쌓아둔 판타지 속에 하염없이 빠져 있었던 거다. 그는 역시 ‘대단한 콘셉트 장인’이었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홀랑 빠져있던 나와 가족은 이 맥시멀리스트에게 호기심을 넘어 호감이 생기고야 말았다. 눈으로 본 것, 만지고 경험한 모든 부분이 완벽한 시나리오에 의한 조작이라니! 이 놀라운 작당에 깊이 빠져 황홀했던 나는 차라리 주어진 시간 동안 계속 그 판타지에 머물러 보기로 결심했다.

어른들을 위한 호텔판 디즈니랜드

‘템퍼스 푸짓’ 레스토랑
‘템퍼스 푸짓’ 레스토랑
빌 벤슬리는 먹고 마시는 공간은 또 어떻게 설계했을까. ‘템퍼스 푸짓(TEMPUS FUGIT)’으로 향했다. 건축대학으로 설정된 식당 공간에도 역시 경이로운 상상력이 반영됐다. 건축대학이자 식당인 이 건물의 이름은 라틴어로 ‘시간은 날아다닌다’를 의미한다. 시간 아까우니 부지런히 먹고 놀아보라는 뜻일까? 인문학적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참 된 지금까지도 궁금하다.
화학대학으로 꾸며진 바.
화학대학으로 꾸며진 바.
여하간 화학대학으로 꾸며진 바(디파트먼트 오브 케미스트리)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그리고 버섯 종균 배양실로 콘셉트를 잡은 스파(샹트렐 스파)를 충분히 더 즐기지 못하고 돌아온 게 아직도 아쉽다.

이 리조트엔 푸꾸옥 최고 레스토랑 핑크펄도 있다. 총장의 사모님, 심지어 두 번째 부인인 펄 여사의 집을 개조해 온통 핑크빛으로 꾸몄다. 푸꾸옥 최고의 파티 레이디였던 펄 여사는 인근 상류층은 물론 학생들과 교수들의 사랑을 받아 학장의 죽음 이후에도 그 집에 머물 수 있었다고. 물론 꾸며낸 얘기다.

빌 벤슬리의 세계관은 ‘꿈만 같은 여행’을 진짜 꿈으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그의 확고한 세계관과 판타지 속에 머물다 온 시간은 도무지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으니 말이다.

이헌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