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대신 정치 택한 아카데미…82세 거장 '마틴 스콜세이지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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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평론가의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심층 분석
마틴 스콜세이지 각본·연출한 <플라워 킬링 문>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새로운 정착지 배경
석유가 발견된 이후 백인들이 벌인 참극 그려
로버트 드 니로와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 열연
네이티브 아메리칸 '릴리 글래드스톤' 열연
거장의 수작임에도 아카데미상 단 하나도 못받아
'오펜하이머'의 역설…전쟁 시대 고찰해 상 싹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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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이 왜 없었겠는가.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물론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팀도 행사가 밋밋할 것을 염려했던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레슬링 선수 출신의 B급 액션배우 존 시나를 벌거 벗겨 무대에 내세웠겠는가. (그가 사람들 앞에서 팬티 바람으로 있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길래 망정이지) 진행자 지미 키멜과 존 시나의 ‘누드 쇼’는 폭소를 만들어 내는데 충분했지만 아무래도 약간 민망했던 것이 사실이다.그렇다고 다시 윌 스미스를 불러 크리스 롹의 뺨을 치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것이다. 스미스는 2022년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리스 롹이 시상자로 나서 자신의 아내인 제이다 핀켓 스미스를 상대로 성적 농담을 하자 무대에 올라가 그를 때렸다. 윌 스미스는 이 일로 2032년까지 시상식 참가가 금지됐다. 윌 스미스를 데려 올 수 없다 해서 다 늙은, 워렌 비티와 페이 더너웨이를 또 다시 데리고 왔다가는 큰일 날 일이다. 둘은 2017년 제89회 시상식 때 최우수작품상을 ‘문 라이트’가 아닌 ‘라라랜드’로 호명해 수상 번복 소동이 일어났었다. 어찌 됐든 이번 존 시나의 ‘나체 쇼’는 1974년 제46회 시상식 때 벌어진 해프닝을 패러디한 일인 만큼 ‘윌 스미스의 따귀 퍼포먼스’든 ‘워렌 비티&페이 더너웨이의 수상작 바꿔치기 음모 쇼’ 같은 것이든 몇 년 있으면 다시 보게 될 코믹 콩트가 될 것이다.
이변은 어쩌면, 그리고 역설적으로, ‘오펜하이머’의 싹쓸이 때문에 생겼다. 그건 모두 예상한 일이어서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상한 면이 있다. 마틴 스콜세이지에게 감독상을 주지 않은 일이다. 그는 현재 82세이다. 그가 이번에 수상을 하지 못했다는 건 그에게 앞으로 남은 수상 기회란 공로상 외에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카데미가 스콜세이지에게 이번에 마지막으로 감독상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으며, 그게 맞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이번에 내놓은 ‘플라워 킬링 문(원제 : 더 킬링 오브 플라워 문)’이 내용적으로나 작품 규모로나 비교적 압도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올리버 스톤이 찍은 ‘도어스’(1991)에서 주인공 짐 모리슨이 뉴멕시코 사막에서 늙은 인디언을 만난 후 음악적 삶을 찾게 된 것처럼 마틴 스콜세이지도 젊었을 때 오클라호마 황야 지역 어딘 가를 떠돌다 만난 인디언 여성 때문에, 그때부터 이 영화를 생각했을 것이라는 ‘느낌적 느낌’을 갖게 만든다. 물론 이 영화는 원작이 있다. 데이빗 그랜이란 작가가 쓴 르포르타쥬이다.
오클라호마에 오세이지족이라는 인디언 부족 집성촌이 있다. (* 2014년 영화 중에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이란 작품이 있는데 원제가 ‘August : Osage County’이다. 오세이지 족이 만든 지역 이름이 오세이지 카운티이다.) 이 '네이티브 아메리칸(우리가 흔히 인디언이라 부르지만 인디언은 인도 사람을 의미한다. 그보다는 미국 원주민 혹은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란 표현이 맞다)'들은 다른 원주민들과 달리 석유 채굴권을 갖게 돼 큰 부자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오세이지족 조차 백인들이 막대한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살상을 당했음을 알 수가 있다.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마틴 스콜세이지식의 미국 이민사, 미국 원주민사를 담은 작품이다. 그는 ‘갱스 오브 뉴욕’같은 작품으로 아일랜드 계의 이민 역사를 미국사의 큰 한 축으로 다룬 바 있다. 본인 자신은 이탈리아 계이다. 마틴 스콜세이지는 숱한 걸작을 통해(예를 들어 ‘좋은 친구들’같은 갱스터 무비를 통해서도)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초가 얼마 만큼의 핏빛 역사를 지니고 있는 지를 갈파해 왔다. 그럼으로 이번 감독상이 마틴 스콜세이지를 비껴간 것은 미국인 스스로가, 혹은 아카데미상 회원들 스스로가 현재로서는 ‘역사가 스콜세이지’ 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보다 오펜하이머가 처했던 시대, 곧 전쟁의 시대를 고찰했던 ‘정치인 크리스토퍼 놀란’을 선택했다는 의미가 된다. 아카데미는 종종 복잡한 내면을 보여 준다.
여우주연상도 물론 엠마 스톤이 받을 자격이 충분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예상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가장 미국적인 선택이란 바로 ‘플라워 킬링 문’의 릴리 글래드스톤이었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그녀의 연기가 최고봉은 아니었더라도 그녀는 네이티브 아메리칸 출신이고, 만약 아카데미가 이 원주민 배우에게 여우주연상을 시상했다면 그 정치적 파급효과는 대단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트럼프가 다시 재선될 지 모르는 시대에 미국의 소수 인종과 민족, 약자들에게 힘을 주고 사람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계기를 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카데미는 그런 기회를 저버린 셈이다. 이번 아카데미의 최대 이변은 그래서, ‘오펜하이머’의 싹쓸이로 인한 ‘플라워 킬링 문’의 몰락이다. 단 하나도 타지 못했다. 심지어 미술상도 못 탔다. 최대 이변이다. 어떻게 보면 엠마 스톤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남우 조연을 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도 마찬가지였다. 최대 격전지는 여우 조연상 부문이었다. 다들 한결같이 좋은 작품에 나온 배우들이었고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호사가들은 ‘오펜하이머’의 에밀리 브론트나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에 나온 조디 포스터가 가져 갈 것이라고 봤다.
개인적으로는 ‘오펜하이머’의 플로렌스 퓨가 후보에 들지 않은 것이 못내 불만이었다. 이변은 그런 등등의 마음이 통했었던 듯 싶다. 다 비껴갔다. 대신 ‘바튼 아카데미’의 데이바인 조이 랜돌프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프랑스 영화계가 ‘추락의 해부’를 국제장편영화상 후보로 추천을 하지 않은 것은 바보 같은 이변이었다. 그들은 각본상 하나로 만족해야 했다. 반면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없었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국제장편영화상에서 음향상까지 가져갔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우슈비츠 얘기를 시각보다는 음향으로 스토리를 짠 작품이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 비극을 통해 그 정도의 심각성, 역사의 깊이를 다룬다. 당연히 음향상 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탄 것은 미국인들, ‘미국적인 사고의 영화인들’, ‘미국적 영화 대중들’이 일본인과 일본 것에 대한 경외가 남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한 이변이었다. 1990년 아카데미는 일본 쿠로사와 아키라에게 공로상을 시상했다. 이번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뒤를 이어, 거의 공로상 급으로 상을 받은 셈이다. 아카데미의 관심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살짝 넘어 가고 있다. 그 추세를 잘 들여다 봐야 할 때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두고 국내 개봉 당신 일었던 군국주의 논란이 약간 머쓱해 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영화는 가능하면 넓고 깊은 시선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을 두고도 할 얘기이다. 이변이 없었다니. 이변은 늘 있는 법이다. 살아가는 모든 일이 이변일지니. /오동진 영화평론가
▶▶[영화 '플라워 킬링 문' 리뷰]https://www.arte.co.kr/stage/review/article/30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