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탈리아 기권, 프랑스도 '기준 완화' 요구
EU 공급망실사법 투표 무산…2주내 진전 없으면 폐기 위기(종합)
기업에 인권·환경 보호 의무를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럽연합(EU)의 공급망실사법이 막판 위기에 봉착했다.

EU 상반기 의장국인 벨기에 정부에 따르면 28일(현지시간) 27개국 상주 대표 회의에서 '기업의 지속 가능한 공급망 실사 지침'(이하 CSDDD) 최종 타협안 승인을 위한 가중다수결 투표가 무산됐다.

승인을 위해선 가중다수결제에 따라 전체 회원국의 55% 이상(15개국 이상), EU 전체 인구의 65% 이상이 찬성해야 하지만 규모가 큰 국가가 잇달아 기권 혹은 반대하면서 찬성표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해 27개국 중 13개국이 기권 의사를 밝혔다.

1개 국가는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당초 찬성 입장이던 프랑스도 막판에 지지를 철회했다.

충분한 찬성표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주대표 회의에서 투표를 강행했다가 부결되면 모든 입법 절차가 그 즉시 종료될 위험이 있어 아예 투표에 부치지 못한 것이다.

CSDDD 승인 투표는 이달 초에도 충분한 찬성표를 확보하지 못해 이미 두 차례 연기된 바 있다.

이후 이날 투표도 무산되면서 시행 자체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앞으로 약 2주 안에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으면 법안 승인이 6월 6∼9일 유럽의회 선거 이후로 미뤄질 수 있다고 로이터 통신은 예상했다.

27개국 승인 외에 유럽의회의 별도 승인 절차도 남아있는 데다 선거 일정상 현 의회 회기가 4월 말이면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최종 타협안 승인 이후 이를 법률 문서로 만드는 기술적 작업에 걸리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통상 선거 3개월 전까지는 입법 절차가 완료돼야 한다.

이에 EU도 내달 1일로 예정된 대사급 상주대표회의 혹은 같은 달 7일 장관급 이사회가 27개국 승인을 위한 최종 시한으로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의장국 벨기에는 일단 기권 혹은 반대 회원국이 제기한 우려 사항에 대해 유럽의회와 다시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미 의회와 합의해 마련한 최종 타협안보다 규제 수위를 낮추는 방향으로 다시 수정할 가능성을 내비친 셈이다.

프랑스의 경우 규제 대상 기업 기준을 현재 직원 수 500명 이상에서 5천명 이상으로 완화해야 한다고 막판에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안 승인이 선거 이후로 미뤄지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이사회와 의회가 최종 타협안이 크게 수정된 형태로 승인 절차를 밟거나, 아예 원점에서 재검토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새로 꾸려질 의회에 친(親)기업 성향의 그룹이 대거 입성할 경우 법안 자체가 폐기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2027년 본격 시행을 목표로 하는 CSDDD는 기업이 전체 공급망에서 발생 가능성이 있는 강제노동이나 삼림벌채 등 환경 피해를 방지하고 문제 해결 의무를 부여하는 내용이다.

규정 위반 시 연 매출액의 최대 5%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한국을 비롯해 유럽에 진출한 제3국 기업도 규제 대상이다.

CSDDD는 앞서 작년 연말 이사회·유럽의회·집행위 간 3자 협상이 타결됐으나, 이후 마지막 승인 단계에서 독일 연립정부 일원인 자유민주당(FDP)이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다며 제동을 걸었다.

독일 정부는 결국 연정 내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기권하기로 했고 이탈리아도 가세했다.

환경·인권 단체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를 위해 원안대로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기업들은 불필요한 행정 부담만 가중된다며 법 시행에 부정적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