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종다양한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을 대변해 온 작가

1980년대 초반, 이른바 ‘어둠의 자식들’ 혹은 ‘꼬방동네 사람들’로 불리는 인간 군상(群像)에 관한 글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작품 속 주인공은 입만 열면 보통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은어(隱語)’를 쏟아낸다. 매우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그 단어들은 책 속에서 친절한(?) 주석과 함께 활자화되어 독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 중심에 ‘이동철’이라는 인물이 있다.
꼬방동네 사람들_앞표지
꼬방동네 사람들_앞표지
‘이동철’은 필명이다. 본명은 이철용(李喆鎔, 1948~ ). <꼬방동네 사람들> 이전에 작가 황석영(黃晳暎, 1943~ )의 이름으로 발행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유명해진 장편소설 <어둠의 자식들>(1980.7.1. 발행)의 주인공 이름이 바로 ‘이동철’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작품이 성공하자 이번에는 아예 주인공 이름을 필명삼아 후속 작품을 써낸 것이다. 따라서 <꼬방동네 사람들>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작가가 되기 이전의 ‘이동철’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어둠의 자식들> 표지 날개에 나와 있는 소개글을 보면 “기지촌에서 자란 이동철은 서울로 올라와 창녀촌과 시장바닥 뒷골목을 배회하며 펨푸, 퍽치기, 시라이를 거치는 동안 아동보호소, 소년원, 유치장, 감방을 전전하며 뚜룩질, 탕치기, 기둥서방, 소문난 찐드기로 성장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 인물과 그 주변 이야기를 엮은 소설이 바로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한편, <어둠의 자식들>의 저자로 표기되어 있는 작가 황석영은 1980년 판 ‘작가의 말’에서 작품 출간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빈민들의 삶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글은 이동철 형이 구술하는 것을 다섯 사람이 제각기의 입장에 따라 기록하였고, 숱한 일화와 사건들을 두 사람이 정리하였으며 최종적으로 필자가 검토하여 앞뒤 순서를 정하고 들어내기도 하고 첨가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글은 필자 개인의 감성이나 재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공동적인 노력으로 씌어진 것이다. 공동적인 노력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형의 피눈물나는 반평생이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감명을 주었던 까닭이다. ― 출처: <어둠의 자식들>(1980.9.30. 개정판), 현암사, 4쪽.
어둠의 자식들_표지
어둠의 자식들_표지
그리고 다음 해에 나온 <꼬방동네 사람들>의 발문에서는 “이동철 형이 구술하고 내가 정리했던 <어둠의 자식들>이 책으로 나온 지도 벌써 한 해가 지나갔다. 그 기록은 책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거의 전부가 그의 것이고, 저작권마저도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모두 그의 노력과 재능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책은 자서전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요컨대, <어둠의 자식들>은 ‘이동철’ 곧 ‘이철용’이 구술하는 내용을 작가 ‘황석영’이 받아 적어 완성시킨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작가 ‘이동철’은 사뭇 다른 어조로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의 출간 배경을 술회하고 있다.

1978년 3월 ‘여의도 부활절 예배 사건’으로 지명수배돼 도주 중일 때다. 잡혀 죽으면 자식들한테 남겨줄 것이 하나도 없겠더라. 그래서 어려서부터 겪었던 나와 이웃 이야기를 버무려 대학노트에 편지 형식으로 써내려갔다. 아버지가 왜 이렇게 살게 됐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창경원에서 키우는 사자가 병에 걸리면 신문에 보도되지만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많이 굶어 죽어도 관심 갖지 않던 시절이다.

병역법으로 도주 중이던 대학생들을 숨겨준 일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내 노트를 정리해 출판사로 보냈고 얼마 뒤 ‘어둠의 자식들’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처음엔 소설가 황석영 씨 이름으로 나갔다. 내가 수배 중이라 내 이름으로 책이 출간되는 게 가능하지도 않았다. 근데 이 책이 예상외로 많이 팔린 거다. 그러니 출판사에서 돈을 들고 와서 “한 권 더 써달라”고 요청하더라. 그래서 또 썼다. 그렇게 쓴 게 ‘꼬방동네 사람들’이다.
― 출처: 매일경제 김동은 기자 [Weekend Interview] 빈민운동가·베스트셀러 작가·국회의원·역술인·유랑가수…이철용의 '이것이 人生이다'(2017.12.23.)

작가 황석영은 이동철의 구술을 받아 적은 다음 정리한 것이라고 하는데, 정작 작가 이동철은 대학노트에 편지 형식으로 써내려간 것이라는, 서로 다른 진술을 하고 있어 당시의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어쨌든 두 책 모두 작가 이동철의 삶에 기반을 둔 자전적 소설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다만,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 그 어디에도 작품 출간에 따른 작가의 소감이랄까, 작가의 직접적인 육성이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은데, <꼬방동네 사람들>의 발문에 황석영 선생이 직접 인용 형식으로 기술한 내용을 보면 작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도 있겠다.

글을 쓰기 위해 습작 연습을 따로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려주어야겠는데, 어떤 방식으로 들려주어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여러 가지로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꼭 소설 쓰는 식, 수필 쓰는 식, 논문 쓰는 식 등의 격식도 모르니 솔직하게만 전달할 수 있다면 그만 아니겠는가라는 겁 없는 생각으로 휘갈겨 봤다. 다만 숨쉬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도 땅을 딛고 먹고 자면서 한마디쯤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 출처: <꼬방동네 사람들>(1981.6.30. 초판 1쇄), 현암사, 372~373쪽.

피카레스크 형식을 띤 현장소설, 『꼬방동네 사람들』

이 책은 표지 날개의 소개글에 따르면 “<어둠의 자식들> 그 후의 이야기를 이동철 자신이 직접 피카레스크 형식으로 기록한 현장소설”이다. 나아가 “서울 동대문 밖 청계천 뚝방을 낀 옛 기동찻길 주변의 판자촌 동네의 특이한 생활풍토와 그 주민들 ―행상, 품팔잇군, 윤락녀, 기둥서방, 포주, 밀주장수, 앵벌이, 무당, 소매치기, 돌팔이의사, 호모, 불구자, 여자깡패, 사기꾼, 건달 등 소위 ‘막차 탄 인생’, ‘종착역 인생’들― 의 천태만상으로 살아가는 절박하고 기이한 이야기가 읽는 사람들에의 정련(精練) 되기를 기다리는 원광석(原鑛石)처럼 꾸밈없이 감동적으로 점철되어” 있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이 땅의 사람들’을 필두로 ‘이 풍진 세상을’에 이르기까지 모두 25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 헐리고 쫓기고 다시 짓고 이합집산하던 꼬방동네! 그것은 한 시대 한 사회의 상처이며치부(恥部)이고 축도(縮圖)이며, 아무도 외면할 수 없는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전형적인 가로 152mm, 세로 225mm 크기의 A5(국판) 판형으로, 무선철 방식의 제본에 373쪽에 걸쳐 본문이 인쇄되어 있다. 앞표지를 보면 <어둠의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작가 이름(이동철/作)과 출판사 이름(玄岩社)은 활자로, 책제목(꼬방동네 사람들)은 손글씨로 표현되어 있고, 제호 아래 추상적인 의미를 담은 삽화가 배치되어 있다. 표지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삽화를 누가 그렸을까 궁금해진다. <어둠의 자식들> 표지에도 비슷한 느낌의 삽화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본문 용지와는 다른 백색 아트지 계열의 속표제지 뒷면에 자리 잡고 있는 간기면(刊記面)을 보면 또 다른 특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단행본 출판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간기면 형식을 띠고 있어 주목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저작자 이름과 발행인 이름 이외에는 표기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던 당시에 현암사 단행본 간기면에는 편집 및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고스란하다는 점이 이채롭다.
꼬방동네 사람들_간기면
꼬방동네 사람들_간기면
다음으로, 네모반듯한 한지(韓紙)에 도장을 찍어 정갈하게 붙여 놓은 인지(印紙)도 인상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줏빛 선연한 ‘正國’이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다만, <어둠의 자식들>의 서문에서 작가 황석영이 “이 글을 그(이동철)의 아들 정민이와 내 아들 호준에게 주고 싶다”고 한 데 이어 헌사에서 “이 책을 호준이와 정민이에게 준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정국’은 작가 이동철의 또 다른 자녀 이름이 아닐까 싶다.

파란만장한 생의 주인공 ‘이철용’으로 다시 태어난 작가

이동철은 이후 ‘이철용’이라는 본명을 되찾는다.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이 당시 얼마나 흥행몰이를 했는지, 어떻게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는지, 그의 육성을 통해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970년대 말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 등이 세상에 나왔고 문단과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편지 한 장 제대로 써본 적이 없는 초등학교 졸업자가 쓴 <어둠의 자식들>이 100만 부나 팔리고, 후속작 <꼬방동네 사람들>도 베스트셀러가 되자 언론은 나를 주목했다. 게다가 이장호 감독이 제작한 영화 ‘어둠의 자식들’도 관객 20만 명이라는 당시로서는 초특급 대박을 터트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배창호 조감독이 <꼬방동네 사람들> 책을 사들고 나를 찾아와 “<꼬방동네 사람들>을 내게 달라”고 했다. 나의 첫 소설 <어둠의 자식들>을 제작한 영화 스승 이장호 감독 아래에서 조감독을 했던 배창호가 독립하려는 것이었다. <중략>

배창호 감독과 함께 하월곡동의 산동네를 다니면서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안성기와 김보연 그리고 김희라를 주연 배우로 추천하기도 했다. ‘병신춤’의 명인 공옥진도 합류시키자고 해 당시 안성기와 같은 출연료 250만 원을 지급했다. 배창호 감독은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꿈에도 그리던 감독 ‘입봉’을 했다. 영화는 20만 명의 관객몰이를 했고, 배창호는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김보연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후략>
― 출처: 정책주간지 《공감》, 이철용, [내 인생의 한 컷] ‘꼬방동네 사람들’(2018.07.09.)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이 세상에 나온 지 10년도 되지 않아 이철용은 국회의원이 된다. 말 그대로 국민으로서의 ‘빈민의 대표’가 되어 의정활동에까지 나서게 된 것이다. 물론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어림없는 일이었을 터. 이후 재차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임에도 주위의 눈초리에 아랑곳없이 사주(四柱) 풀이를 해주는 이른바 ‘역술인’의 삶을 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출판사를 바꾸어 서점에 나와 있는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 표지에는 초판에 새겨졌던 ‘황석영’ 또는 ‘이동철’이라는 이름이 아닌 ‘이철용’이라는 이름이 오롯이 박혀 있다.

작가 이철용 최초의 작품 <어둠의 자식들> 첫 소절 “나는 소설이나 책에 관해서는 ×× 모르는 사람이다.”는 당시 독자들에게 참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후속작 <꼬방동네 사람들>은 “청계천변으로 흐르는 썩은 오물, 똥물, 악취 나는 시궁창을 코 앞에 둔 채 즐비하게 늘어선 판자촌 동네.”로 시작한다.

여전히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로 기억되고 있는 한 ‘이철용’은 한 시대를 풍미한 우리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보니 시나브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어둠의 자식들> 개정판(1980.9.30. 발행)과 <꼬방동네 사람들> 초판본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다시 피어오른다. 내 기억에서 잊혔던 작가 ‘이철용’이 <꼬방동네 사람들> 뒤표지에 실려 있던 작가의 초상 사진 속 형형한 눈빛과 함께 부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작가의 근황을 알지는 못하지만, 다음의 글에서처럼 작가 스스로 밝힌 ‘희망 전도사’로서 앞으로도 건강 건필하기를 기원한다.
꼬방동네 사람들_뒤표지
꼬방동네 사람들_뒤표지
첫 작품 <어둠의 자식들>이 도시 룸펜들의 이야기라면, <꼬방동네 사람들>은 룸펜이 되지 않으려는 ‘하꼬방’ 달동네 사람들의 몸부림의 기록이다. 1980년대 초 한국 경제는 성장했지만 분배 문제로 양극화가 심화될 때 <꼬방동네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나눔’과 ‘분배’라는 말을 처음으로 떠올리게 했다.
이후 나는 빈민운동에 투신한 뒤 은성학원(야학) 원장, 기독교 도시빈민선교협의회 위원장, 평민당 도시서민문제특위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평민당 도봉 지역에서 출마해 당선, 국내 헌정사상 첫 장애인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정계를 떠나 인생 상담소 ‘통’을 열어 개개인의 정체된 사주를 풀어주다 1996년 사단법인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을 설립했다.
장애인들에게는 ‘사회복지’도 필요하지만 스스로 문화예술을 향유할 권리, 다시 말해 ‘문화복지’도 필요하다.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가졌던 약자에 대한 작은 생각이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을 통해 ‘건강한 기적’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꿈을 주는 ‘희망 전도사’로 남고 싶다.
― 출처: 정책주간지 <공감>, 이철용, [내 인생의 한 컷] ‘꼬방동네 사람들’(2018.7.9.)
1) 원문에는 ‘精練’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는 “섬유를 순수하고 깨끗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불순물을 없애고 그 특성을 발휘시켜 표백 및 염색을 하는 일”을 뜻하는 말로, “광석이나 기타의 원료에 들어 있는 금속을 빼내어 정제함”을 뜻하는 ‘정련(精鍊)’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