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법 과거완료

“~했다면, ~했을 텐데” 정도로 해석되는 영문법 ‘가정법 과거완료’는 지나간 일을 후회할 때마다 사용하게 되는 표현입니다. 특히, 영어를 영문법책에 집중해 배웠던 세대에게 ‘가정법 과거완료’의 세가지 묶음, 그 시절 줄기차게 되뇌던 "우드, 슈드, 쿠드+해브+피피"는, 마주하자마자 자연스레 ‘후회와 미련’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특유의 아쉬움을 담은 이 표현법은 예술에서도 참 자주 인용됩니다. 일루미네이션의 애니메이션 '씽(Sing, 2016)' 의 주인공 ‘버스터 문’은 아버지의 희생을 통해 물려 받은 극장이 무너져버릴 정도의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는데요. 우여곡절 끝에 성공적인 공연을 마치며 관객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자 이렇게 말합니다.

“오, 아버지가 이걸 보셨다면 …(Oh, dad, I wish you could've seen this!)”

제게 ‘가정법 과거완료’는 ‘후회와 미련’ 대신 ‘그리움’을 더 강하게 안겨주는 문법입니다. 예를 들면, 제 탄생부터 성장을 바라보며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이모와 삼촌이 연이어 떠난 이후, 종종 ‘아, 이 모습을 보셨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가문의 후손이자 기념사업회 활동에 열심이셨던 처가 어른 ‘호주 이모부’가 떠났을 땐 ‘아, 『하얼빈』을 주제로 이야길 나눴어야 했는데’하며 그리워했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때로 작은 성취와 감동을 경험할 때마다 ‘아, 아버지가 이 장면을 보셨어야 했는데 …’ 라는 생각이 스치며 그리움은 쌓여갔습니다. 함께 거닐었던 장소를 지날 때, 유난히 자주 공유했던 음악을 들을 때, 연필깎이나 지우개처럼 추억이 담긴 물건을 볼 때마다 ‘아’ 하고 짧게 탄식하거나 ‘그래야만 했는데 …’ 하고 꾸준히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렇게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참 견디기 힘든 일이구나’하는 생각을 자주 하며 가정법 과거 완료의 세계에 빠져있던 중 마법 같은 책과 음악을 만났습니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의 소설 <여기, 지금 우리가 만나는 곳>은 미술평론가로서 그의 대표작인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 of seeing)> 보다 더욱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작가는 단 한번도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지 않지만,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소설 속 화자가 망자와 대화를 이어가고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주인공이 환각에 시달리거나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연덕스럽게 망자와 산책하고 장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모습이 공포스럽기는커녕 ‘굉장한 상상이다’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이 자전적 소설에서 더 이상 ‘가정법 과거완료’라는 문법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저‘이런 방법이 있었구나’하고 공감했는데요. 망자를 그리워하는 일마저 힘들어지면, ‘곁에 있다’고 상상해내는 편이 위로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이죠.

부고 여러 편을 엮은 책도 마찬가지로 심심한 위로를 줍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던’존재를 ‘언제든 추억할 수 있게’안내하기 때문입니다. 망자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신문의 글을 ‘부고(訃告)’라고 하는데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개정판이 검토되고 있을 <뉴욕타임즈 부고 모음집>은 역사 속 위인과 악인, 각 분야 천재의 삶을 조명합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토마스 에디슨, 넬슨 만델라처럼 인류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남겼거나 이오시프 스탈린과 아돌프 히틀러처럼 수 백 년에 한번 등장할까 말까 싶은 악인의 부고를 차별 없이 (하지만 평가는 냉정하게) 담아낸 이 책은 ‘(물리적으로는) 떠났어도 (마음 속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쉬운 명제를 사유하게끔 해줍니다.

물론 꼭 위인이나 악인이어야만 부고로 기록되는 것은 아닙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부고 전문기자인 제임스 R. 해커티의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거나 평범한 이들의 부고를 엮은 책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과 인생도 얼마든지 기술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고마운 책입니다.

비록 부고 모음집은 아니지만,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평온했던 벨 에포크 시대를 생중계하듯이 들려주는 책 <1913 세기의 여름>은 은근한 위로를 줍니다. 역사 속 인물들이 바로 오늘 아침까지 존재했던 것 마냥 책 안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데, 프란츠 카프카의 고뇌와 <변신>에 이르는 길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인 것만 같습니다. ‘작가 연혁’에 나열된 딱딱한 사실들을 1913년이라는 특정한 시간대에 압축해 이야기를 구성했을 뿐인데 말이죠.

음악으로 쓴 부고

종이신문을 1면부터 시작해, 마치 한 장 한 장 넘기듯 장면을 구성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2023)' 속에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가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영화 음악) ‘오비추어리(Obituary)’가 담겨 있습니다. 신문의 ‘부고’를 뜻하는 이 곡은 유난히 밝은 분위기로 영화를 유쾌하게 만들어 줍니다. 마치 우리에게‘부고가 꼭 슬프고 엄숙해야만 하는 소식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웨스 앤더스 감독이야 원래 비참한 상황도 풍자와 해학으로 버무리는 재주가 있으니 놀랍지 않은데,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마저 음악에 웃음기를 머금었으니 절대로 잊히지 않는 곡이 됐습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오비추어리(Obituary)’를 시간 내어 꼭 들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등 현악기는 시종일관 피치카토(현을 손가락으로 튕기거나 뜯어 연주하는 방식)로 익살 맞게 ‘둥둥둥’ 배경을 만들고, 오보에·클라리넷·바순·튜바 등 관악기들이 주선율을 연주하는 하프시코드와 조화를 이루는데, 담담한 태도로‘아름다운 이별’을 말하려는 것 같아 뭉클합니다.

우연한 위로의 문장

“거울을 볼 때 당신은 자기 얼굴뿐 아니라 하나의 박물관을 보고 있는 셈이다. 얼굴은 자신의 것이지만 한편으론 당신의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그리고 그 위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특성의 콜라주로 이루어져 있다. (중략) 그들은 개인으로서는 이미 죽은지 오래일지 몰라도 당신의 일부로서 여전히 살아 있다”

언어를 중심으로 인류의 대역사를 조명한 문화인류학책 <말, 바퀴, 언어>를 읽은 지 한참이 흘렀지만 또렷하게 기억나는 첫 문장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나만의 것’이라 여겼던 고유의 화법과 언어적 습관, 특정 상황에서의 표정과 행동, 걸음걸이와 같은 신체적 특성이 사실은 수 만년 동안의 정보가 축적된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구체적인 닮음을 만들어내는 ‘축적의 콜라주’를 깨닫게 되어 큰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면 달리거나 걸을 때 오른팔을 왼팔에 비해 좀 더 크게 휘젓거나, 전기장판을 켠 채 이불을 덮을 정도로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발은 밖으로 내놓고 자는 습관처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닮음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닮음이 아버지로부터 제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콜라주’라는 표현에 더욱 공감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조상들의 유전자를 다양하게 물려받았으니, 책임감을 갖고 정해진 구간을 성실히 뛰어야만 하는 이어달리기의 최종주자가 된 기분도 듭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잘 살아내야 하겠구나’ 정도의 다짐이 생겼다고 할까요?

박물관으로부터 온 편지·시간의 연결

박물관에 전시된 주먹도끼와 석탑, 백자와 청자를 보며 감동할 수 있는 까닭은 예술적인 완성도와 심미성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수천에서 수만 년의 시간을 관통한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에 편지처럼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중랑망우공간_한용운 선생
중랑망우공간_한용운 선생
결국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뭉클할 만큼의 위로와 감동을 주는 셈입니다. 알고 보면 내 안에는, 내 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로와 응원이 언제나 쌓여 있습니다. 혼자였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을 테니,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든든한 마음을 갖겠습니다.
중랑망우공간_권진규 작가
중랑망우공간_권진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