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색 옷을 입고 하늘을 나는 피터 팬은 마법에 걸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다. 심리학에서는 어린아이로 남고 싶어 하는 어른들의 심리 상태를 일컬어 피터 팬증후군(Peter Pan syndrome)이라고 한다. 동화 속에서 피터 팬이 영원한 아이로 남고 싶다고 말하자 웬디는 말한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네가 쓸 수 있는 제일 큰 가면 같아.”
〈파이프를 연주하는 피터 팬〉, 프란시스 베드포드, 1911
〈파이프를 연주하는 피터 팬〉, 프란시스 베드포드, 1911
‘어른다움’에 대해 생각해본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일까? 책임감을 지니고 사회에 헌신하는 것일까? 상처가 괴물처럼 나를 잡아먹지 않도록 나 자신을 정성껏 돌보는 것일까? 현실을 인정하고 관례에 수긍하는 태도일까? 힘들 때 도망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모습은 어른다운 모습일까? 순수한 마음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순수만을 갈망하며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를 기억하며 현실을 나아지게끔 애쓰는 사람의 모습. 잘못이라 생각하면 잘못이라고 말하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니라고 말하는 모습 말이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파괴하는 망치가 되는 건 그 사람이 최초의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다. 적확히 말하면 기억 상실한 것이 아니라 기억 외면하며, 인간은 인간을 소리 없이 쏘고 할퀴는 존재가 된다. 최초의 기억만큼 최초의 투정 또한 중요한데, 괜찮지 않은 내 감정을 괜찮다고 말하고, 정의롭지 못한 걸 알면서도 부정하다 외치지 않고, 누군가에게 기댈 정도로 힘든데 꿋꿋이 모든 걸 홀로 감당하다 보면 사람은 무너져버린다.

어린 시절 피터 팬은 가출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웬디네 집을 처음 찾아온 날 피터 팬은 그림자를 잃어버린다. 외로워하는 피터 팬을 보듬어준 건 웬디였다. 어린 피터 팬은 조건 없는 사랑이 필요했고 어른스러운 척하지 않아도 되는 보금자리를 그리워했다. 웬디는 그런 피터 팬의 슬픈 그림자를 꿰매준다. 피터 팬은 웬디에게 하늘 나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러고 그들은 네버랜드로 멋진 모험을 떠난다. 어른에게도 웬디처럼 그림자를 꿰매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피터 팬처럼 날갯짓을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하다. 인생길에는 물어보고 답을 구할 수 있는 친구가 절실할 때가 있지 않은가.
비룡소 제공
비룡소 제공
피터 팬 이야기는 '피터 팬: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1904년 5막의 크리스마스 아동극 초연에서 시작되었다.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제임스 매튜 배리는 이 연극을 동화 두 편,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1908년 출간)과 <피터와 웬디>(1911년 출간)로 만들었다. 장영희 교수가 번역하고 비룡소에서 출간한 <피터 팬>은 두 번째 동화 <피터와 웬디>의 번역 완역본이다.

장영희 교수는 이 책을 번역하며 이렇게 썼다. “어른이든 아이들이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답고 변화무쌍하고 신이 나지만 때로는 불안하고 어설프고 외롭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피터 팬>에서 발견하는 것은 각기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꿈과 마음의 고향입니다. 회사, 학교, 은행 통장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세상, 마술이 있고 아이들이 날아다니고 동물들과 대화하고 악을 물리칠 수 있는 세상을 찾는 이들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고향을 찾는 일은 웬디처럼 다시 현실로 돌아와 좀 더 평화스럽고 좀 더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피터 팬>을 다시 읽으며 밑줄 친 문장은 이것이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날개를 가진 기분일 거야.” 서른 후반의 내가 <피터 팬>을 다시 읽으며 건진 생각은 이것이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있지만 함께 살면 캄캄한 밤을 견딜 수 있다. 영원히 어른이 되지 않는 네버랜드는 현실에 없다. 그러나 모험을 함께할 친구가 있다면 어떤 세계에 놓여도 명랑한 꿈을 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