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ESG NOW

얼마 전 일본 도쿄 도심을 걷고 있을 때 일이다. 한눈에 봐도 초로를 훌쩍 넘을 것 같은 노인이 도로보수 공사 현장에서 표지판을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기도 했거니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이미 공사 현장엔 커다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차든 사람이든 그것만 봐도 왼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는데도 손에 표지판을 든 사람이 5명은 족히 돼 보였다.

은퇴 연령을 넘긴 그 노인이 공사 현장에서 하던 일은 요즘 미국에서 유행하는 말로 ‘bullshit jobs(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다. 하지만 노인의 관점에서 어쩌면 그 일은 삶을 지탱하는 소중한 무엇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령임에도 일자리를 얻었고, 직장이라는 커뮤니티에서 일상의 보람을 느낄지도 모르니 말이다.

요즘 어디를 가든 인공지능(AI)이라는 단어가 난무한다. AI 담론의 가장 유익한 점은 모든 이를 갑자기 철학자로 둔갑시킨다는 것이다. AI와 로봇이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면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과 AI는 어떻게 다른가, 인간의 창의성이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 AI가 일자리를 없앨 것인가 아니면 AI와 로봇 덕분에 사람은 쓸모없는 일에서 해방될 것인가. 질문이 꼬리를 문다.

AI는 쓸모없는 일자리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줄까

AI 이슈는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활동과도 무관치 않다. AI 시대에 기업은 어떤 역할을 해야할 것인가에 관한 근원적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어서다. 가장 큰 화두는 ‘일자리’다. 앞서 예로 든 도쿄 도심의 노인을 떠올려보자. AI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화하면 그 노인의 일자리는 아마 중국산 가성비 로봇이 차지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업 혹은 정부는 분명히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의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 맞을까?

이와 관련해 최근 미국 경제학계에서는 100여 년 전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예언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1930년 케인스는 기술의 진보 덕분에 100년 후에는 일주일에 15시간만 일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알다시피 케인스의 전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최근 포스코 등 몇몇 기업이 주 4일 근무제를 도입하기로 했다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일에 치우친 삶을 산다. ‘과로사’라는 말은 아직 국어사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케인스는 진보주의적 경제학자의 원조로 일컫는다. 문재인 정부 시절 소득 주도 성장의 이론적 기초가 된 인물도 케인스다. 그는 자유방임주의 종말을 고하면서 정부가 수요 견인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스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초기 자본주의를 그토록 혐오하는 동시에 국가의 능력에 힘을 실은 이유는 딱 하나다. 선량하고 우아한 사회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한때 동성애자였으며 예술 애호가였던 케인스는 러시아의 유명한 발레리나와 결혼했다.

다시 케인스의 100년 전 예언으로 돌아가보자. 그가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낙관한 것은 AI, 로봇 같은 첨단기술이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대표적 AI 낙관론자였던 셈이다. 흥미롭게도 경제학자들은 AI 시대를 장밋빛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AI로 대량 실업이 발생할 것이란 암울한 전망은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라고 단언했다. 사라지는 일자리가 있다면, AI 덕분에 새로 생겨나는 일자리가 있을 것이란 얘기다. 크루그먼 역시 케인스처럼 AI와 로봇의 힘을 빌려 사람은 좀 더 고차원적이고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믿는다.

AI 시대 기업의 역할, “새로운 일자리 만들고 적응 능력 키워줘야”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느냐다. 진보적 성향의 경제학자들은 과소 노동과 기본소득에서 해법을 찾는다. 네덜란드 저널리스트이자 사상가인 륏허르 브레흐만은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라는 책을 펴내 관심을 받았는데, 그는 AI 시대야말로 우리가 꿈꾸던 이상적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한다.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영국 런던정치경제대 데이비드 그레이버 문화인류학 교수도 AI 등 기술적 진보를 통해 ‘불시트 잡스’를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 정부든 기업이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아무래도 좋은 헛된 일’을 만들어내곤 하는데, 이러한 불필요한 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렇다면 일자리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써야 할 AI 시대에 기업의 역할은 무엇일까. 쓸모없는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 정답일까? 아니면 쓸모없어 보이더라도 실업을 최소화하는 것이 정답일까? 이와 관련해 최근 글로벌 기업의 움직임은 그리 낙관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AI를 해고의 빌미로 활용하고 있다. 구글 등 미국의 빅테크들은 벌써 수백 명의 엔지니어를 해고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AI 시대 가장 위협받는 직업군으로 반복적인 ‘사무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러’를 꼽는다. 예컨대 그레이버 교수는 ‘쓸모없는 직업’으로 안내원, 비서, 사내 변호사, 로비스트, 광고·홍보 업무 종사자, 고장 접수를 하는 콜센터 직원, 각종 조직의 중간관리자 등을 사라져야 할 직업으로 꼽았다. 그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AI가 대체할 직업군으로 봐도 무방하다.

ESG에 AI가 추가될 날 머지않아

기업으로선 이 같은 일자리를 없앰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기업이 쓸모없는 일자리를 없앴다고 해서 사회로부터 칭찬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특히 ESG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가치 실현에 위배된다. 직업을 없애면 이를 대체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기업의 의무다. 이와 관련해 〈세계는 평평하다〉 등의 저서로 퓰리처상을 수차례 받은 토머스 프리드먼의 전망을 참고할 만하다.

그는 AI를 활용할 줄 아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노동시장이 크게 갈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거대 언어 모델(LLM)에 기반한 생성형 AI 기술이 갈수록 고도화되면서 AI를 활용할 줄 아는 자와 모르는 이로 세상이 나뉠 것이고 주장했다. 이른바 ‘평균의 종말’이다. 어쩌면 여기에 기업의 역할에 관한 힌트가 담겨 있을 듯하다.

ESG는 ‘자본주의는 지속가능한가’라는 화두에서 출발했다. 질문 형태의 화두이긴 하지만, 사실 답은 정해져 있다.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없으며,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를 후세에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기술혁신 이론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는 스스로 비판받기를 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자본주의는 비판조차 겸허히 받아들이며 자기 변호를 이끌어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스템이라는 통찰이다. 이러 의미에서 보면, ESG는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투자자들은 단순히 돈이 되는 산업과 기업에만 투자하지는 않는다. 환경을 보호하고, 사회에 보탬이 되며, 투명한 지배구조를 갖춘 산업과 기업에 투자하려고 한다. AI 역시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선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다.

하지만 ESG를 외부에서 부과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할 규칙으로만 바라봐선 선제적 대응이 어렵다. 테크놀로지의 진화와 함께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시스템 전반에서 엄청난 소용돌이가 치고 있어서다. AI와 관련한 규범을 기업 스스로 만들 수 있느냐가 ESG 평가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ESG에 AI가 결합된 ‘ESGA’라는 신조어가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박동휘 한국경제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