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 조선 말기,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왔다. 성경을 들고 온 선교사들,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깨우러 온 외교관들, 시장을 개척하러 온 상인들, 여행가들, 목적은 달랐지만 배를 타고 멀리 태평양을 횡단해 제물포(인천)에 내렸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다.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은 비위생적인 주거 공간이었다. 늦은 밤 배를 타고 제물포에 내린 서양인들은 난감했다. 제물포에서 서울까지는 꼬박 12시간이 걸리는 거리로 이른 아침 제물포에서 출발해야 성문이 닫히기 전에 서대문이나 숭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장 인천에서 하룻밤 묵을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곳에 호텔이 들어섰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 (大佛, 다이부츠 호텔)이다. 1887년에 착공해 1888년에 완공했다. 주인은 일본인 호리 큐타로인데 풍채가 불상처럼 크다 해서 호텔 이름이 대불이다. 인천시는 대불호텔을 2011년 복원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
대불호텔에 묵은 서양인들은 이른 아침 서울로 출발했다. 보통은 가마나 조랑말을 이용했다. 가마는 1시간에 6km를 걸을 정도로 빠르게 이동했다. 한강을 건널 때는 마포나루에서 내렸다. 만리재 옛길을 따라 숭례문으로 들어왔다. 김포, 양천을 거쳐 나룻배를 타고 양화진으로 도착한 사람들은 와우산, 노고산을 넘어 신촌의 대현을 통과한 후 아현(애오개)을 넘어 충정로를 지나 서대문으로 들어오거나 아현에서 약현(중림동)을 넘어 숭례문으로 들어갔다.
노량진역의 철도시발지 표지석
노량진역의 철도시발지 표지석
그런데 1899년 9월 18일 경인선이 개통됐다. 처음에는 제물포에서 노량진까지만 운행했다. 정거장은 제물포역, 유현역, 우각역, 소사역, 오류역, 영등포, 종착역이 노량진이다. 12시간 걸리던 길이 1시간 40분으로 줄었다. 1900년 7월에는 한강철교가 가설돼 서대문 정거장(서대문역)이 종착역이 됐다. 걸어서 하루 종일 걸리던 길이 수로를 통하면 8시간, 철도 가설 이후에는 2시간이면 서대문 정거장에 도착했다. 이제 제물포에 도착한 서양인들은 굳이 호텔에서 하룻밤 묵을 이유가 없었다. 대불호텔은 문을 닫았다.

서대문 정거장(서대문역)의 위치는 지금의 이화외고, 농협 일대이다. 역 바로 옆에 ‘스테이션호텔’이 생겼다. 역에 붙어있는 ‘역전 호텔’이다. 서대문역은 서대문-청량리 구간의 전차 종점인 경교(서울적십자병원)와도 붙어 있었다. 서대문 밖, 이화외고와 농협, 서울적십자병원 일대가 기차와 전차를 아우르는 교통의 요지였다. 1901년 우리나라를 찾은 미국인 ‘엘리아스 버튼 홈즈’가 기차에 내려 스테이션 호텔에 투숙했다.
조선을 끝까지 지키려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있었다
“이 독특한 도시 서울의 정거장에 막 도착한 기차에서 우리가 내리자, 흰옷을 길게 늘어뜨린 한 젊은이가 카드 하나를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스테이션 호텔 훌륭한 시설, 저렴한 가격, 군대 나팔 소리와는 먼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중략) 호텔로 따라갔는데 철도역에서는 몇 걸음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중략) 엠벌리 부인의 어머니와 같은 보살핌 덕에 우리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식사와 잠자리 문제는 별걱정 없이 해결되었다.” (이순우, 손탁호텔, 하늘재 50페이지)

역에서 걸어서 2분도 채 걸리지 않는 스테이션 호텔은 서양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마늘 냄새 나는 조선 사람이 아닌 영어를 쓰는 고향 엄마와 같은 여자가 호텔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엠벌리 부인이 처음 오픈한 호텔은 한옥을 개조한 호텔이라서 불편함도 많았다. 마르텡으로 소유가 넘어가며 근사한 서양식 건물로 변했다. 이름도 스테이션 호텔에서 ‘애스터 하우스’로 바뀌었다. 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사람에 대한 광고가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24일에 실렸다.

“전 한성판윤 배국태씨의 매제 배정자와 일본 유학하여 졸업한 시종무관 박영철 씨가 새문 밖 호텔에서 혼례를 거행하였는데, 예절과 잔치하는 음식을 다 서양법으로 하고 내외국 신사 수백 인을 청하여 대접하였다더라.”

여기서 말하는 새문 밖 호텔은 애스터 하우스(전 스테이션 호텔)를 말한다. 그런데 배정자라니… 이 칼럼 '동양극장 편'에서 소개한 조선의 마타하리, 요화 배정자이다. 배정자의 ‘공인’된 세 번째 남편이 박영철이다. 박영철은 전주 출생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시류를 읽어 일찍부터 일본어를 배웠다. 부모 몰래 일본에 밀항하여 운 좋게 일본 육사 15기를 졸업했다. 러일전쟁 참전 후 승승장구해 시종무관(황제 경호장교), 함경도지사, 조선 상업은행(우리은행 전신) 두취역(임원)까지 한 인물이다. 본처를 버리고 친구 현영운의 아내인 배정자와 이 호텔에서 호화 결혼식을 했다. 유유상종이다.

세상의 조소 거리가 된 이 결혼 생활은 5년을 넘지 못했지만, 결혼식은 장안의 화제가 되어 신문에까지 실렸다. 수백 명을 초청해 서양 음식을 대접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초호화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에는 당연히 아버지인지 남편인지 모를 이토 히로부미까지 참석했을 것이다.

조선인으로 일본을 위해 한평생 주구 노릇을 하던 이들과 달리 조선을 끝까지 지키려 한 외국인도 이 호텔과 관련이 있다. 이 호텔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서울신문의 전신, 대한매일신보의 사장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裵設, 1872~1909)이다.
한국인의 영원한 친구 베델
한국인의 영원한 친구 베델
그는 영국인으로 일본 고베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 3월 '데일리 크로니클' 특별 통신원 자격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세계 언론은 러일전쟁의 정확한 보도를 위해 대한제국에 특파원을 파견했다. 경운궁(덕수궁)의 대화재 사건이 일본의 방화라는 기사를 쓰며 고립무원인 우리나라를 옹호하기 시작한다.

데일리 크로니클에서 해고된 후, 1904년 7월18일 그는 전동(수송동)에서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한다. 현재 서울신문의 전신이다. 그가 친일 기사를 썼다면 일본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꺼져가는 나라, 조선과 함께하고자 했다. 지천으로 깔린 주인 없는 황무지를 무상으로 취득하려는 일본의 욕심을 기사화하여 일본의 ‘대한 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특히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의 입장을 대변했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도 가차 없이 지적했다.

일본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러나 베델의 국적이 영국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치외법권이 적용돼 함부로 제재하지 못했다.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에 우호적 입장을 보인 영국이 오히려 베델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영국은 일본의 조선 침탈을 눈감아주려 했다. 대신 일본과 공동전선을 구축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고 한 것이다.

일본은 영국의 치외 법권을 이용해 베델을 처벌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1908년, 현재 정동에 있는 영국총영사관에서 재판을 해 3개월 금고, 6개월 근신, 벌금 4만환을 선고했다. 계속 베델과 신문사에 압박을 가했다. 베델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애스터 하우스에서 1909년 5월1일 심장확장증세로 사망했다. 재판의 스트레스, 그로 인한 과도한 음주, 흡연이 사망 원인이었다. 그의 나이 37세다. 장지연은 묘소 앞 비석에 추모의 글을 남겼으나 일제가 비석을 훼손해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양화진에 있는 베델의 훼손된 비석
양화진에 있는 베델의 훼손된 비석
1960년대 이르러 베델의 묘비를 다시 세웠고, 타임즈에 광고를 실어 런던 교외에 거주하는 며느리와 손주를 찾을 수 있었다. 그 후에 영국 현지 조사를 통해 베델의 가계, 학교, 집안이 운영한 회사를 밝혀주는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는 베델에게 독립 훈장을 수여했다. 양화진 외국인 묘소에 가면 초입에 그의 비석이 있다. 우리는 친구의 가치를 너무 늦게 발견했다.

이 호텔에서 호화 예식을 올린 배정자와 박영철, 그들은 나라를 팔아 개인의 욕심을 채웠다. 이 호텔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안간힘을 썼던 외국인 베델, 그는 목숨을 바쳐 조선을 지키려고 했다. 이 아이러니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새문 밖 비탈길, 한 호텔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