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필라테스가 대세인 듯한데, 얼마 전까지 요가가 핫트렌드였습니다. 저도 7년이나 요가원을 다녔는데요. 요가수업이 여성전용은 아니어도 대부분 수강생은 여성일 경우가 많은데, 간혹 한 두 분 정도 남성 수강생이 참여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요가수업 때의 일입니다. 그날도 남성 수강생이 두분 참석을 했는데 한분은 앞쪽에 다른 한분은 뒤쪽에 자리를 잡았고 약 스무명 남짓한 수강생들이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다양한 요가자세를 취하고 있었지요. 한참 요가자세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잔잔한 음악소리를 뚫고 갑자기 “뿡!”하는 커다란 방귀소리가 그 공간에 울려퍼졌습니다.
요가 클래스에서 방구소리가 나면 우리는 남자 회원을 본다
누군가의 민망한 실수를 애써 외면하기엔 그 소리가 너무나 커서 다들 난감하겠지 했던 순간, 모두가 일제히 뒤쪽에 자리 잡은 남성 수강생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방귀소리에 성별차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소리의 크기와 톤으로 볼 때 여성의 것은 아니란 판단을 대부분의 수강생이 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 수강생은 아.저.씨.였거든요.

그러나 다수의 눈으로 지목당한 수강생은 그 상황이 몹시 억울한 듯 했습니다. 양손으로 손사래를 치면서 본인이 아니라며 부인했죠. 선생님이 나서서, 요가 자세가 장을 자극해 누구라도 실수를 할 수 있다고 혼란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남성 수강생은 여전히 억울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 자신이 범인이라 자수하지 않는 한 찾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저는 비교적 그 수강생과 가까이 있었던 탓에 알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그 사람이 범인은 아니란 것을요. 결과적으로야 민망한 상황에 빠진 ‘어떤 여성’을 위해 그 남성 수강생이 흑기사가 되어준 셈이지만, 흑기사란 본인이 자발적으로 나설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남성이란 이유로 혹은 소수란 이유로 다수에 의해 흑기사를 강요받는 건 정의롭진 않은 일이죠. 더구나 커다란 방귀소리는 당연히 남성, 특히 아저씨의 것일 거란 편견이 문제였죠.

그날의 해프닝은 저에게 요가와 연관된 잊지못할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그 남자 수강생에게는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지 모르겠네요.
영화 <저스트 머시> 포스터 ©다음영화
영화 <저스트 머시> 포스터 ©다음영화
실존인물인 인권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슨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영화 <저스트 머시>는 이렇게 편견이 사람 잡는 이야기입니다. 억울하게 백인 소녀의 살인 용의자로 몰려 재판을 받게된 주인공 월터는, 그가 살인자라는 증거 대신 백인 증인의 증언만으로 배심원들에게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경찰의 연행, 용의자 특정, 재판과정 모두가 편견으로 가득 차 있죠.

1986년 미국 중부의 백인 검사에게 ‘가난’한 ‘흑인’ 남성은 ‘잠정적 범죄자’라는 편견이 확고했던 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심원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편견 앞에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흑인’ 변호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의뢰인 접견을 위해 백인 직원 앞에서 팬티까지 다 벗어가며 굴욕적인 몸수색을 받아야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변호사가 된 주인공 브라이언은 오직 증거자료에 입각해서 월터의 무고함을 밝히고자 합니다. 하지만 ‘범인=흑인’이라는 편견을 넘어 브라이언이 극복해야 하는 또 다른 편견이 있었죠. 세간의 주목을 받고있던 이 사건의 변호가 결국 실패하고, 변호사인 그에게는 사회적 사망선고가 내려질 거라는 주변인들이 확신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조차 그런 위험 편에서 두려워했으니까요.

게다가 억울한 사형수 월터 또한 자신을 돕기위해 찾아온 변호사 브라이언을 믿을 수 없습니다. 무려 ‘하버드’씩이나 나온 부족할게 없는 변호사가 자신의 무고함을 믿어주고 사형을 면하게 해줄리 만무하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월터는 브라이언에게 마음을 열고 함께 재심을 진행하게 됩니다.
영화 <저스트 머시> 스틸컷 ©다음영화
영화 <저스트 머시> 스틸컷 ©다음영화
영화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하게 합니다. 편견에 갇혔던 사람들이 마음을 열며 변화하는 시선과, 자신의 편견이 잘못이었음을 알면서도 그걸 감추기 위해 거짓을 합리화하고 진실을 부정하는 시선, 자신의 가난과 무지를 원망하며 자포자기했다가 점점 진실에 눈을 뜨고 용기를 얻어가는 시선들을 말이지요.

스토리나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보다도, 인물들 하나하나의 시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가 결말의 힘과 맞닿아 있어 더욱 큰 감동을 주는 영화입니다. 특히 재판에서 브라이언의 법정진술은 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강한 메시지로 전달되는데요.

"저는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법대를 졸업했습니다. 세상을 바꿀 생각으로요.
하지만 우리의 생각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월터) 맥밀리안이 깨닫게 해줬습니다. 마음 속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 사람은 저에게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제 희망을 잃는 건 정의의 적이란 걸 알았습니다. 희망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진실을 왜곡할 때에도 말입니다. "
영화 <저스트 머시> 스틸컷 ©다음영화
영화 <저스트 머시> 스틸컷 ©다음영화
늘 자신만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편협한’ 인간이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을까요? 특히나 요즘처럼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입장만을 더욱 강화하는 시대에 말입니다.

그럼에도 최대한 공정하고 정의로운 시선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입장에서 벗어나 최소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후설(E. Husserl)은 마치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듯이, 자유로운 태도 변경을 통해 중립적인 시선을 취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관점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그 관점을 변경할 수도 있음을 뜻하죠. 문제는 ‘당연하다’는 내 믿음의 효력을 ‘중지시켜 보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들은 바로 그 당연함 때문에 결코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마치 공공장소에서 방귀를 크게 뀔 수 있는 능력(?)은 ‘아저씨만’의 것이라는 다수의 믿음 처럼요. 전혀 근거 없는 편견임에도 말입니다.
요가 클래스에서 방구소리가 나면 우리는 남자 회원을 본다
물론 자신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내려놓고, 중립적이고 공정한 태도로 세상일을 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면 지금은 맞지만 그때는 틀린 경우도 많기에, 언제나 옳고 당연한 것이란 흔치 않으니까요. 타인을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당연하다는 편견을 내려놓고 중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그들이 가진 편견을 걷어내고 새로운 시선으로 사안을 다시 바라보는 태도 변경을 확인한 것처럼요.

실존인물 브라이언의 말처럼, 흑인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던 시절에도 인권을 지키겠다는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곧 정의입니다. 동시에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만들고 지켜 온 정의를 위해 우리도 최소한 희망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김정민 나은미래플랫폼 주식회사 ESG경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