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사태 후 투자자보호 규정·법 고쳤지만…'관리·감독 소홀' 지적
금감원 "은행 자체평가·개선 지도하고 정기검사에서도 점검"
"불완전판매 확인 전에 정부가 은행 책임 기정사실로" 문제 제기도

홍콩H지수 흐름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되는 주가연계증권(ELS)의 수조원대 손실이 임박하면서, 이 사태의 책임을 둘러싼 공방도 달아오르고 있다.

금융당국은 당장 "무지성", "면피"라는 격한 표현을 동원해 이 상품을 대거 판매한 은행권의 내부통제 소홀 탓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하지만 금융소비자와 학계에서는 ELS 같은 고위험·고난도 상품의 판매를 제도와 행정력으로 관리·감독해야 할 당국 역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 "은행, ELS 무지성 면피"…소비자 "그 발언도 당국 면피용"(종합)
◇ "은행 내부통제 강화한다더니…당국 제대로 점검했나"
앞서 지난달 29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H지수 ELS' 실태조사와 관련한 언론 질문에 "묻기도 전에 (은행이) 무지성으로 소비자 피해 (예방) 조치가 마련됐다고 운운하는 것은 자기 면피로 들린다"며 "자필(서명) 받았다든가, 녹취를 확보했다든가 (말)하는 게 불완전 판매 요소가 없다는 얘기 같은데, 금융소비자보호법상 적합성의 원칙과 본질적 취지를 생각하면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은행권이 예기치 못한 H지수 급락에 따른 대규모 ELS 손실에 당황하면서도, 과거 라임·옵티머스·DLF(파생결합펀드) 펀드 사태와 달리 불완전 판매 등 위법 행위와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대한 직접적 비판이다.

현재 은행들은 금융소비자보호법, 고난도 금융투자상품 표준영업행위 준칙 등을 적용해 H지수 ELS 판매 과정에서 가입상품 위험등급, 원금손실 가능성 등에 대한 이해 여부를 고객으로부터 자필 또는 녹취를 받아 확인을 거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종 가입 의사를 확인한 이후에도 수일간 청약 철회 기간을 두고, 은행 본점이 다시 ELS 상품 가입자에게 전화로 상품 가입 의사와 판매직원의 설명 여부 등을 물어본다는 게 은행권의 설명이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2019년 DLF 사태 당시에도 ELS는 은행에서 판매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피해자들이 주장했고, 금융감독 당국은 은행 ELS 판매에 대해 내부통제를 강화하겠다고 했다"며 "그래서 투자자가 직접 입으로 상품과 위험성을 이해했는지 말하게 했는데, 그런 조치들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당국의 점검이 없었던 것 같다.

금감원장은 은행이 면피한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당국이 면피용 발언을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대 은행법학회장(한국해양대 해사법학부 교수)은 ELS 책임 소재와 관련해 "(ELS에) 큰돈을 맡긴 분들은 '은행이라서 믿고 맡긴 것'이라고 항변할 것이고, 그러면 은행이 설명을 제대로 했는지, 파생 상품을 팔아도 될만한 고객에게 판 것인지, 적합성이나 설명의무 등 이런 걸 따지게 된다"며 "투자자들 상황이 모두 다르고, 개별 사례들이라 결국 법적으로 다툴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당국에 대해서는 "은행 등이 ELS 같은 상품을 얼마나 판매하고 있는지, 리스크(위험) 관리는 잘하고 있는지 미리 체크했어야 할 텐데, 그런 활동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은행 리스크 관리에 대해 점검했더라면 지금보다 좀 낫지 않았을까 생각되는데, 당국도 이런 측면에서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금감원 관계자는 "2021년 말 금소법 관련해 강화된 내부통제 절차가 제대로 마련됐는지 은행들에 체크리스트를 보내 자체 점검하도록 했고, 2022년 상반기에 그 결과를 받아 은행별로 미흡한 사항을 개선하도록 했다"며 "이후 은행별 정기검사 과정에서도 내부통제 실태를 점검해왔다"고 밝혔다.

◇ DLF 사태 후 녹취·숙려기간 등 의무화…고난도 공모펀드는 은행 판매 허용
김 대표의 말처럼, 실제로 금융 당국은 DLF 사태 이후 2019년 11월 대대적으로 '고위험 금융상품 투자자보호 강화를 위한 종합 개선 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보도자료를 보면, 당국은 '파생상품 내재 등으로 가치평가 방법 등에 대한 투자자의 이해가 어려운 상품으로서, 최대 원금 손실 가능성이 일정 수준(20∼30%) 이상인 상품'을 '고난도 금융투자상품'으로 규정하고, ELS 등 주식연계상품을 예시로도 명시했다.

이런 고난도 금융투자상품에는 녹취·숙려기간·핵심설명서 교부·공시 등의 의무를 부과했다.

이후 이 방안에 따라 실제로 녹취·숙려기간 등을 도입했고 H지수 ELS 판매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했을 뿐인데, 개별 판매 건에 대한 불완전 판매 조사가 이뤄지지도, 결과가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당국이 확정적으로 벌써 '면피' 운운하는 데 대해 은행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만기가 돌아오기도 전에 당국이 대놓고 '은행이 면피한다'며 마치 은행 책임을 기정사실로 못 박았는데, 그 어떤 가입자가 민원을 제기하지 않겠나"라며 "집단 민원이나 소송을 부추긴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문제를 지적했다.

아울러 당시 보도자료에서 당국은 고난도 사모펀드의 경우 은행 판매를 제한했지만, 고난도 공모 펀드의 경우 허용 방침을 분명히 밝혔다.

◇ 금소법 초기 혼란에…당국 "적합성 평가 경우에 따라 간소화"
2021년 3월 25일 금융소비자보호법이 시행된 뒤 은행 창구에서 거래 시간이 크게 늘어 불만이 커지자, 적합성 평가의 간소화를 일정 수준 허용해준 것도 당국이다.

같은 달 29일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 후 원활한 금융상품 거래를 위해 판매자·소비자가 알아서 할 중요사항을 알려드립니다' 보도참고자료에서 당국은 '고객 적합성 평가'에 대해 "경우에 따라 간소화할 수 있다"고 고지했다.

더구나 "과거 거래를 했던 소비자가 신규 거래를 하려는 경우 과거 소비자로부터 제공받은 정보와 적합성 판단 기준에 변경이 없다면 적합성 평가를 해야 할 실익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현재 은행들이 "H지수 ELS 같은 이른바 고난도 상품의 경우 자체 조사 결과 90% 정도의 고객이 이전에 다른 ELS 등에 가입한 적이 있는 투자 경험자"라고 강조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울러 해당 보도참고자료에서 당국은 "소비자의 금융상품 거래시간 단축을 위해 적합성 평가는 영업점 방문 전 비대면으로 하고, 그 결과를 영업점에 전달하는 시스템 구축 등 효율성 제고 방안을 업계와 함께 모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설명의무' 관련 항목에서는 "설명의무는 설명서를 빠짐없이 읽으라는 의미가 아니다"라며 "반드시 설명서를 구두로 읽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동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할 수 있다"라고도 했다.

일각에서는 H지수 ELS 판매 과정에서 AI(인공지능) 음성 안내를 통한 설명과 녹취가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은행권은 AI가 이 다양한 매체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다만 금감원 관계자는 당시 안내 내용에 대해 "적합성 평가나 설명의무를 대충해도 된다는 뜻은 전혀 아니었다"며 "금소법 시행 초기에 금융사들이 설명 의무를 기계적이고 형식적으로 이행하는 경향이 있어, 오히려 중요 사항 중심으로 명확히 설명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 "은행, ELS 무지성 면피"…소비자 "그 발언도 당국 면피용"(종합)
◇ "설명의무 위반 사실, 소비자가 입증…유의해야" 당부하기도
금융소비자보호법이 도입됐지만, 선택한 상품 손실에 대해 소비자 자신이 책임져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당국도 여러 차례 언급했다.

2021년 3월 29일 보도참고자료를 보면, 당국은 금융사에 "소비자가 충분한 이해 없이 (가입을) 확인하려 할 경우, 이런 소비자의 확인이 추후 소송이나 분쟁에서 소비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추가 설명 부분에서는 "설명 의무 위반에 대한 손해배상 입증 책임 전환 규정에 따라 판매자가 입증해야 할 사항은 '위반 사실'이 아니라 '위반에 고의·과실이 없음'이다(위반 사실은 소비자가 입증)"라고도 했다.

같은 해 5월 10일 '고난도 금융투자상품 및 고령 투자자에 대한 녹취·숙려제도가 시행됩니다' 보도자료에서도 "투자자들도 녹취·숙려 절차가 적용되는 금융투자상품은 객관적으로 위험하고 어렵거나, 자신에게 맞지 않을 수도 있는 상품이라는 점을 유의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번 H지수 ELS 건을 계기로 은행도 자체적으로 고위험 상품의 가입 과정에서 상품구조나 위험성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경제 전망이나 상품 위험성 판단 관련 능력이 미흡하지 않은지 꼼꼼히 점검해야 할 것"이라며 "아울러 정부도 고위험 상품 가입의 위험을 알리는 투자자 대상 교육과 홍보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