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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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아트' 돌풍의 정점, 필라델피아 미술관 ‘시간의 형태: 1989년 이후 한국 미술’'

한국 현대미술이 미국 미술계를 뒤흔들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필라델피아 미술관(Philadelphia Museum of Art, 이하 PMA) 에서 열리고 있는 ‘시간의 형태: 1989년 이후 한국 미술’(The Shape of Time: Korean Art after 1989) 전시는 준비기간, 예산, 규모, 주제 등 모든 면에서 현재 불고 있는 K아트 돌풍의 최정점에 서 있다.

전시는 2014년부터 9년에 걸친 준비 기간 끝에 세상에 공개됐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미술관의 리더십 교체 등 여러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만큼 오랜 리서치와 작업 기간을 통해 완성도를 높였다.

전시는 지난 10월 21일부터 내년 2월 11일까지 네 달 동안 이어지며, 28명의 작가가 참여하여 300평에 달하는 전시장을 가득 채운다. 신미경과 김주리의 미술관 커미션 작품을 포함해 강서경, 권하윤, 마이클 주, 바이런 킴, 박경근, 박찬경, 서도호, 손동현, 장지아, 정은영 등 다양한 연령대와 배경을 가진 작가군이 대거 참여했다.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눈이다.

전시는 군사 정권 이후의 민주주의, 남북한 갈등, 도시화와 세계화, 젠더 이데올로기 등 지난 30년 간 한국사회가 걸어온 격변의 역사를 다양한 각도로 분석한다. 동시에 회화 조각 공예 사진 영상 등 서로 다른 장르의 작품을 통해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한국미술의 변천사를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전시와 함께 작가 토크, 퍼포먼스, 워크샵, 펜실베니아 대학교와 공동 주최하는 심포지엄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관람객을 찾을 예정이다.

전시와 함께 발간된 전시 도록은 예일대학교 프레스(Yale University Press)에서 출판되었고,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아시아 미술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Alexandra Munroe) 등 유명 인사들이 저자로 참여해 대중성과 전문성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 있다.

전시는 PMA의 소장품 담당과 우현수 부관장과 미국 근현대 공예 및 장식 미술과 엘리자베스 애그로 큐레이터가 공동 기획했다. PMA는 특히 다양한 분야의 협업을 강조하는데, 매년 미국에서 가장 큰 공예 페어를 주최하는 기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예술 매체간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요즘 다양한 공예기법과 현대미술의 만남을 찾아보는 것도 관람의 핵심 포인트이다.
필라델피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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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큐레이터 모두 PMA에서만 각각 20년 정도 근무한 미술계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라 시작 전부터 세간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전시 오프닝에만 800여 명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미술관 관계자에 의하면 역대급이라고 한다. 오프닝 참석을 위해 한국에서 날아 온 미술계 인사들도 여럿 눈에 띄였고, 에미상을 수상한 한국계 앵커 니디아 한(Nydia Han) 등 현지 유명 인사들도 모습을 비췄다. 특히 미국 전역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작가, 큐레이터 등 미술계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여 K아트 축제를 방불케 했다.

PMA는 다양한 시대와 지역, 문화권, 주제를 넘나드는 전시를 선보인다. 규모 면에서 미국 내 가장 큰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힌다. 영화 ‘록키’ 촬영지로도 유명한 PMA는 1876년 장식 미술품 전문 미술관으로 첫 출발했다. 이후 소장품을 확대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4000년의 역사를 아우르는 24만여 점의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고 도록과 아카이브 자료만 2만 권이 넘는다. 이런 주요 대형 기관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집중 조명한 전시를 선보이는 일은 극히 드물 일이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미국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현재 미국 내 한국 미술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대규모 그룹전인 만큼 2층 전시관을 포함해 미술관 입구와 1층 로비 등 PMA 건물 곳곳에서 전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스퀄킬 강가를 내려다 보는 곳에 있는 미술관 서쪽 입구에는 신미경의 대형 비누 조각 작품 ‘동양의 신들이 강림하다’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비누 작가’로 잘 알려진 신미경은 사라지긴 쉬운 비누의 물질성을 이용해 3개의 야외 설치 작품을 제작했다. 이번 작품은 총 5만개에 달하는 적갈색 비누를 녹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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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 안쪽에는 1층과 2층 2개 층을 연결해 층고를 높인 특별 전시 공간이 있다. 이 곳에는 서도호의 옥색의 천으로 지은 ‘서울 집’과 하지훈의 ‘자리’가 설치돼 있다. ‘집 속의 집’ 연작으로 유명한 서도호는 해외에서는 백남준 이후 가장 잘 알려진 한국인 작가 중 한 명으로 통한다.

2층 전시장 초입에는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정치, 사회적 갈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소개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선보이고 있는 정연두의 ‘을지 극장’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다. 남북 분단을 주제로 비무장지대(DMZ) 주변에서 촬영한 사진들에 허구적 요소를 섞어 만든 대형 사진 콜라주이다. 이외에도 노순철, 임민욱, 함경아 등 남북한 대립과 민주화 과정 속에서 발생한 다양한 긴장과 불안을 모티브로 작업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필라델피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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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경의 2004년 비디오 작품 ‘파워통로’와 권하윤이 가상현실 기술을 이용해 비무장지대를 재현한 ‘489년’이 나란히 전시된 점 또한 눈길을 끈다. 박찬경은 얼마전 박찬욱 감독과 공동 연출한 단편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베를린 영화제 단편영화 부문 황금곰상을 수상한 미술계를 대표하는 중진이다. 권하윤은 현재 가상현실 기술을 접목한 영상 작품들로 예술과 기술의 접점을 가장 잘 이해하는 젊은 한국 현대미술 작가 중 한명이다.

이들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안내하는 동시에 한국 작가들의 기술에 대한 이해와 역량도 보여준다. 그 맞은 편에는 안세권의 ‘월곡동의 사라지는 빛’ 사진 연작과 김주리의 ‘소실되는 풍경휘경: 필라델피아’가 근대화와 도시화 과정 속에서 발생한 강제 이주와 부동산 개발에 관련된 주거 문제를 다룬다.

전시 중반부의 주인공은 전통적 예술기법이나 재료를 현대미술에 접목시킨 작품들이다. 현재 리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선보이고 있는 강서경의 조각 작품들이 이목을 사로잡는다. 전통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실, 가죽, 나무, 철사 같은 기본 재료들을 꼬고 비틀거나 재배치해서 회화적 이미지를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재료의 다양한 물질성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각각의 작품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한국의 풍속화와 같은 균형 잡힌 절제미를 재현한다.

한 옆에는 이수경의 최근 조각 작품들이 자리한다. 작가는 서로 다른 재료들을 하나로 이어 붙여 만든 도자기 콜라주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는 신라의 금관과 백제의 금동대향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달빛 왕관’ 연작을 포함해 총 5점을 출품했다. 두 명 모두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작품이 출품된 적 있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작가들이다. 이밖에 유의정, 윤상희 등은 전통 공예작품에 현대감각을 입힌 조각작품들을 선보여 전시를 한층 더 다채롭게 한다.
필라델피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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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작가들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기량을 뽐내면서도 해외에는 덜 알려진 손동현의 회화나 장지아의 사진, 오재우의 영상 작품을 보여준 점 또한 고무적이다. 특히 오재우의 국민체조 영상은 단순하지만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전시 홍보영상에도 쓰일 만큼 파급력이 대단하다. 전시 말미에는 한국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인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오인환은 필라델피아의 게이바와 게이클럽들의 이름을 향 가루로 조각해 천천히 태워 완성한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정은영의 영상작품 ‘유예극장’을 통해 한국사회 내 변화하는 성 역할과 성적지향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유니 킴 랑은 조선시대 여인들이 사용했던 머리 가채 모양의 작품으로 한국여성에게 강제된 여성성을 환기한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바이런 킴과 마이클 주는 디아스포라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작품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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