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순 칼럼] 언제까지 3不인가, 기여입학제 공론화 해보자
금단이 많으면 선진사회가 못 된다. 성역은 적은 게 바람직하다. 교육에선 더 그럴 것이다. 자율·독립 기반에서 다양성과 다원화, 개방이 교육의 큰 가치일진대 24년 된 ‘3불(不)’ 정책은 여전하다. 기여입학제·본고사·고교등급제는 논의조차 쉽지 않다. 한국 공교육과 입시 제도의 근간이라는 이 ‘3금(禁)’이야말로 성역이 됐다. 국가적 3대 개혁과제에 교육을 넣은 현 정부도 3불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않는다.

이 중 적어도 기여입학제에 대해선 시행을 공론화할 때가 됐다. 재정난에 허덕이며 경쟁력을 잃어가는 대학부터 살려야 한다. 부실 대학을 방치한 채 교육개혁은 헛구호다. 학자금 부족으로 쩔쩔매는 우수 학생들도 내버려 둘 수 없다. 대학과 입시가 교육개혁의 전부일 수는 없지만, 변화를 실감하기에 좋은 전략 지대다. 실제로 변화가 절실한 낙후 지대다. 좌우보혁 정권이 거듭 바뀌어도 등록금 동결의 철권 정책은 15년째 이어진다. 이로 인해 대학 재정난은 날로 가중된다. 초·중·고교로 가는 교육교부금이 남아돌아 주체하지 못하는 것과 비교된다.

그 결과 국내 최고 대학들도 국제 평가에서 자꾸 밀린다. 그래도 정부는 보조금을 찔끔찔끔 뿌리며 은연중 굴종을 강요한다. 백발의 총장이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아니 작은 불이익이라도 면하기 위해 젊은 교육부 사무관에게 고개 조아리는 장면은 이미지만으로도 끔찍하다. ‘상아탑’이 작은 지원금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간섭과 통제에 휘둘리는 것이다. 인공지능(AI) 시대, 한국 대학 실상이다.

기여입학제는 나랏돈을 쓰지 않으면서 대학을 대학답게 정상화할 수 있다. ‘정원 외 1%’ 정도로 가면 기여 입학생으로 인해 직접 불이익을 받는 수험생도 없다. 유수 민간 대학에서 정원 외에 30~40명쯤 더 수용하면 해마다 수백억원의 특별 교비가 생긴다. 이 돈에 대해서는 엄격한 사용 제한, 투명·공개의 회계처리를 명문화해도 좋다. 가령 60%는 장학금, 10~20%는 실험·실습교재 등 강의 확충 비용, 20~30%는 인건비로 용도를 정해도 좋다. 300억원을 장학금으로 쓴다면 연간 1000만원씩 3000명이 혜택을 누린다. 혈세에 기대는 한국장학재단이 개별 대학에 이렇게 지원을 늘릴 수 있나. 교수들을 강의와 연구에 더 몰두하게 할 수도 있다. 기여금의 전용 금지도 안 될 것 없다.

그래도 미심쩍다면 기여입학제 대학에는 일체의 정부 지원을 끊는 것도 보완책이다. 재정 지원에 기댈지, 정부 간섭 없이 자립할지 대학이 선택하면 된다. 교육이 아니어도 더 많은 선택이 좋고, 강요·강제보다는 인센티브를 통한 자발 결정이 바람직하다. 학력 수준 같은 지원 학생 자격 문제는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최소한의 수학 요건 정도는 대학 스스로 정할 것이다. 수능 등급의 일정 컷이나 최소 내신 등급을 정해두면 대학 면학 분위기도 지킬 수 있다. 오로지 기여금만으로 입학이 결정 나지는 않는 것이다. 사립 대학이 발달한 미국 등에서는 오래된 방식이다. 과거 한국의 음성적 ‘뒷문입학’에 대한 나쁜 환영에 빠져 있어선 곤란하다. 제도로 양성화해 투명하고, 당당하게 가면 된다.

‘정원 외 최소 비율 제한, 수학 기본 요건 명시, 기여금 투명·공개 사용’이라는 3대 조건하에 기여입학제를 논의해보자. 공론화라는 게 필요하다면 이런 것이다. 대학도 살고, 장학금 빈곤에 허덕이는 대학생에게도 덕이 된다. 성적은 어정쩡한데 집안 형편은 좋은 학생의 도피형 유학을 줄인다면 외화 낭비도 줄어든다.

부실은 투입 비용(input) 대비 결과(output)의 불균형이다. 학업 성취도, 직업 준비, 학부모·학생 만족도, 어디로 봐도 지금 한국의 학교와 교육 정책은 부실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변해야 한다. 끝없이 ‘형평’에만 매달릴지, ‘실용·효율’에도 주목할지 냉철해질 때다. 수능 본시험도 아닌 모의고사에서 특정 과목이 쉬웠느니 어려웠느니가 주요 뉴스이고 장황한 해설까지 따라붙은 풍토, 불수능·물수능 논쟁이 입시의 핵심 담론인 게 정상인가. 대학은 건학 이념에 따라 지향하는 교육 가치에 맞춰 스스로 학생 선발권을 가져야 한다. 기여입학 해금은 대학 자율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수월성교육과 평등교육에 대한 생산적 논의도 가능해진다.